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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국제정세론

승자학

by Diligejy 2022. 1. 17.

p.9~10

나는 낙관론자도 혹은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미국의 헌법을 포함하여 미국의 각종 제도들은 미리 비극을 예측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부분적으로 낙관할 만한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이미 대통령에 대한 탄핵원칙이 헌법에 명시되었다. 제임스 메디슨은 [연방주의자] 제51호에서, 인간은 구제불능이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야심을 품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고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두는 것뿐이라는 생각으로, "만약 인간이 천사라면 정부는 필요가 없다"고 썼다. 미국의 권력분립은 인간행동에 대한 비관적인 관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대로 프랑스 혁명은 대중의 선한 의지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선한 결과를 창출할 지식인들의 역량에 바탕을 두고 시작되었으나 기요틴이라는 단두대로 막을 내렸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인간관계는 잘못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려했다는 점에서, 건설적인 비관주의자들이었다. 독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작가의 일이듯, 독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것 역시 작가의 일일 수 있다. 독자들이 차라리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는 일 말이다. 또한 외교정책은 종종 최악의 시나리오로 착안되기도 한다. 따라서 필자의 비관주의나 회의주의는 적절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21세기의 정치가들을 시험하는 것은 국제관계에서 제대로 되어가는 일들이나 휴머니스트들이 당연히 반길 그런 일들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암울한 문제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p.22

정보의 확산이 꼭 사회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15세기 중반 활판인쇄술을 발명하자 그 뒤를 이어 종교혁명과 종교전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인쇄물이 갑자기 보급되면서 종교적 논쟁을 촉발했고 또한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고충들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정보의 확산은 사회적으로 새로운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일치할 수 없는 새롭고도 복잡한 이슈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됨에 따라 새로운 분파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p.40

처칠의 힘과 위대성은 다방면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벌린의 설명이 가장 적합할지 모른다. "처칠의 도덕적 지적 세계를 구성하는 단 하나의 중심적인 원리는 역사적 상상력인데, 그것은 너무도 강력하고 설득력이 강해서 현재의 모든 문제들과 미래의 모든것을 풍부하고도 다양한 색깔로 채색한 과거의 얼개에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처칠은 과거, 특히 고대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벌린의 설명에 따르면, 처칠은 "인간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p.65

리비우스는 파비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들이 당신의 신중함을 겁먹은 것으로, 지혜를 태만으로, 그리고 용병술을 약점으로 폄하하더라도 신경쓰지 말라. 어리석은 친구가 칭찬하는 소리를 듣기보다는 현명한 적이 당신을 두려워하도록 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 그리하여 리비우스는 왁자지껄한 대중의 견해라는 것이 종종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p.66~67

리비우스는 또 다른 많은 교훈들 또한 들려준다. 군사적 패배 뒤에 로마가 독재자를 선출한 데 대해 리비우스는 "병든 사람은 건강한 사람에 비해 약간의 고통이라도 훨씬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망에 빠진 국가는 사소한 성과만 보고서도 그것을 최고의 해결책으로 인식하고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페루가 1990년에 독재자에 가까운 알베르토 후지모리를 선택한 것,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가 우고 차베스 장군을, 파키스탄이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을 선출한 것은 리비우스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보여준다.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불가침조약을 파기했을 때, 리비우스는 '법적 기준'은 그것이 현실적인 힘의 균형을 반영하지 않는 한 대체로 의미가 없다고 서술했다. 이 점은 훗날 20세기 프랑스의 휴머니스트 레이몽 아롱도 언급했다.

 

사람들은 국제법은 장기적으로 현실에 따르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토는 그 상태가 지속된다면, 반드시 법률상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어 있다. 상대방 국가의 도발을 차단하려는 강대국은 무장을 해야지 사전에 도덕적 부당성을 선언할 필요는 없다.

 

p.79

손자와 사마천은 마치 그들 자신들이 큰 물리적 고통을 직접 경험해본 듯이, 그리고 그것의 재발을 막는 일이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손자와 사마천의 도덕성은, 마키아벨리와 처칠에게서는 물론이고,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결과의 도덕성이다.

 

p.88

투키디데스는 문명은 야만성을 억제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시대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발전할수록 각 시대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또 취약한 곳이 있다는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한층 더 필요하다. 그것이 대재난을 막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p.95

불완전한 세상에 살면서, 선한 행동을 하려는 착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충고한다. 이어서 마키아벨리는, 우리 모두는 사회적 세계를 공유하기 때문에 미덕이란 개인의 완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모든 것은 정치적 결과와 연관된다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에게 정책이란 그 자체의 우수성이 아니라 그것이 산출하는 결과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다. 어떤 정책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미덕일 수가 없다.

 

p.109-110

마키아벨리의 지혜의 핵심은 본능적 필요와 이기심이 정치를 이끌고 가고, 그리고 그것 자체가 선한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격한 도덕적 요구는 다른 것들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즌 전쟁이나 내전을 일으키는 반면, 상충되는 이기심들은 타협의 기초는 마련하기 때문이다.

 

p.121

처칠은 천성적으로 다원주의자였다. 다원주의자란 많은 사물들(특히 자신의 여러 행동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특정한 어느 하나가 미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자신을 무시한 외교관료들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졌음을 증명한 또 다른 지도자인 레이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처칠은 도덕적 열정 - '깨끗한 증오' - 을 타고났는데, 그것은 체임벌린의 실용주의와 운명주의보다 한층 더 효과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앞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짓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운명을 믿지 않을 수 없다."

 

p.124~125

지리적 위치, 집단의 특성,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결정하지는 않는다. 개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국가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실체이다. 자유의지는 인간 본성의 핵심이다. 그리고 역사가 어느 정도는 우리들보다 현명할 수도 있고 우리는 역사의 방향을 알 수 없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정책 입안가들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예측하기 위해 모든 수단들을 스스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관점은 자명한 진리인 듯 하지만, 마르크시즘과 다른 여러 사회과학의 학설들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 벌린이 속해 있던 학계에서 그런 분명한 주장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벌린이 공격했던 마르크시즘과 파시즘은 사라졌다. 하지만 다른 여러 결정론적 이데올로기들,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술결정론 같은 것은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 것인데, 그 점이 바로 벌린의 반전제주의적 저술들이 21세기에도 오래도록 읽힐 것이라고 판단하는 이유이다. 그렇다 해도 오늘날의 외교정책은 벌린이 모든 형태의 결정론들을 일소함으로써 거부하고 있는 듯한 환경, 인구구조, 역사적 맥락, 그리고 다른 여러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 

 

벌린은 칸트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이 하는 행동의 진정한 발상자들이야말로...... 그들이 행한 것들에 대해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결정론은 도덕성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환경, 인구구조 그리고 역사적 맥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거나 혹은 그것들이 개인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요지는 다만, 우리의 행동이 제아무리 외부의 요소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우리 행동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p.144~145

비록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군주정치에 대해서 홉스보다는 훨씬 낮게 평가했지만, 열정과 이기심이 어떻게 사람들을 부추겨 다른 사람들을 해치도록 하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메디슨의 희망적인 생각, 즉 미래의 "미합중국은 수많은 부문들, 이해관계들, 그리고 시민들의 계층들로 쪼개진 사회로 구성될 것이다. 따라서 개인들의 권리, 혹은 소수집단의 권리는 다수집단의 이해결합으로부터 거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매디슨은 결론적으로 안전은 '다양한 이해관계들' 그리고 '다양한 파벌들' 때문에 보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홉스로부터 상당히 멀리 나갔지만, 그들은 홉스의 중심적 가설로부터 떠나지는 않았다. 즉, 좋은 정부는 오직 인간의 열정에 대한 냉정한 이해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매디슨이 주장한 것처럼, "플라톤이 바랐던 것과 같은 철학자 군주만큼이나 철학자들로 구성된 국가는 기대할 바가 못된다."

 

미국의 혁명은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의 발명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홉스와 마키아벨리의 철학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물질적 수단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욕구가 모든 갈등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마키아벨리였다. 그리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인간은 얼마나 많은 물질적 부가 충분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필요하든 않든 계속 획득하고자 한다. 그것이 홉스로 하여금 재산획득을 위한 투쟁을 평화적으로 규제하는 공명정대한 감시기구, 즉 국가의 윤곽을 고안하도록 했다. 홉스는 국가를 사회로부터 완전히 구분한 최초의 철학자로서 그 목적이 애당초 최고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동선만을 추구하는 현대적 관료주의 권력의 도래를 예상했던 것이다. 그 점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p.161~164

구체적으로 민주주의, 시장 자본주의, 그리고 개인의 인권에 대한 새로운 존중 등이 권력정치와 국가 및 집단들의 이기심을 대체함으로써 인간이 드디어 인간의 본질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냉전 말기의 많은 사람들은 믿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모든 인간은 동일한 진보적인 지평선을 향해 진군한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이사야 벌린과 레이몽 아롱은 -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홉스 그리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뜻을 이어받아 - 그런 생각은 인간의 분열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 바깥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실제로 공화당 우파가 '가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나 자유주의자들이 '인간적 개입'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공산주의에 패배에 따른 보다 높은 도덕성의 표출이라기보다는 국내 안전과 번영이 가져온 만족의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히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소설에서, 기원후 2세기경 로마의 여성들의 자유가 컸던 것은 로마라는 도시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시절이 풍요로웠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비록 미국의 부의 확대가 보다 큰 이타주의를 가능케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국가와 국가의 하부집단들에 국한될 것이기 때문에 빈곤과 불안은 가장 미개발된 지역의 인구증가 및 도시화와 결합되어 잔학행위를 한층 더 유발할 것이다.

 

우리는 정책 입안가들과 언론들이 선언한 새로운 인권시대는 전혀 새롭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키케로 이래 정치가들은 어떤 독재자도 거부할 수 없는 '인간 공동체'를 위한 도덕원칙들을 선포해왔다. 1880년, 영국의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계획적인 권력 조작에 맞서 차후에는 기독교적 품위유지와 인권옹호가 외교정책의 기본이 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글래드스턴은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의 산골마을"에 사는 "인간의 거룩함"까지 보호해줄 "국가들의 새로운 법률"에 관해 언급했다. 물론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우드로 윌슨은 또 다른 하나의 인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했지만 그 또한 실현되지 않았다. 1928년 일본, 독일, 영국,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62개 국가들이 모여 전쟁을 불법화하는 켈로그브리앙 협정을 비준하고는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했다. 그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L.스팀슨은 "이 조약을 비웃는 비판자들은 대전쟁 이후 세상을 보는 관점의 진보를 정확하게 평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헨리 키신저가 우리에게 상기시킨 것과 같이 원칙은 대체로 자기실현적이지 않으므로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즉 또 다른 대전쟁이 발발했다.

 

얄타 회담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수세기 동안 시도되었던 일방적인 행동, 베타적인 동맹, 세력권, 힘의 균형, 그리고 다른 여러 권력수단들은.... 종말을 맞았고 또한 항상 실패했다." 그런 후 그는 '세계적 조직', 즉 유엔의 창설을 제안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인 1945년 초에 스탈린은 중부 및 동부 유럽을 40년 이상 동안 속국으로 묶어둘 세력권을 형성했다. 그 위험을 직감한 처칠은 미국으로 하여금 붉은 군대가 진격하기 전에 먼저 베를린과 프라하를 장악하도록 설득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오늘날 또다신, 글래드스턴, 윌슨, 스팀슨, 그리고 루스벨트의 정신에 따라 새로운 인권의 시대가 선언되었다. 심지어 그 모든 미덕에도 불구하고 세계화가 역시 해로운 도시화를 촉진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확대하고, 그리고 고조되는 민족 감정에 불을 지른다는 것이, 다시 말해 정치적 극단주의에 기름을 붓고 또한 그 결과 인권유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이 증명되었는데도 말이다.

 

가치는 그것이 원칙상 아무리 보편적이라 해도 그것을 강요할 힘과 이기심이 필요한 것이다. 1990년대에 바티칸, 그리스 정교 대주교, 그리고 유엔은 발칸의 전쟁 범죄에 대해 명확한 비난 성명 대신에 유화적 언사로 대응했다. 독일의 유사한 위엄있는 정당들이 나치의 범죄에 대해 대응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인간과 인간의 조직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앞서 타인의 이익을 생각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기보존을 위한 본능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구호단체들 그리고 다른 여러 비정부단체들에게도 이기심이 먼저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적은 지역보다도 많은 지역에 정부가 개입해주도록 압력을 가한다.

 

언론이 보스니아에는 그렇게도 관심을 보인 반면, 아브하즈, 남부 오세티야, 그리고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을 적게 기울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런 구호단체들 - 때로는 이런 단체들이 언론의 최고 정보통이다 - 이 카프카스보다는 발칸에서 활동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잔인함으로 가득차 있고 또 심지어 우리 스스로의 선한 의도가 때로는 보기보다는 훨씬 덜하기 때문에, 유대인 대학살의 도덕적 교훈, 그 '상징적 잔학행위'의 교훈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많은 곳에다 적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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