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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국제정세론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스트라우스

by Diligejy 2022. 1. 27.

p.11

드러리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스트라우스의 진면목은 허무주의적인 니체다. 신은 죽었고 정의의 기반도, 도덕의 기반도 사라졌다. '진리가 없다는 것' 그것이 '냉혹한 진리'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많은 대중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도덕을 헌신짝처럼 버릴 것이고 그러면 사회는 도덕적 무정부상태에 빠져서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그래서 '진리'는 냉혹함을 견딜 수 있는 소수의 엘리트만이 알아야 한다. 나머지 멍청한 대중들은 엘리트들이 지어낸 정의와 도덕, 신화를 믿으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고귀한 거짓말'이다. 플라톤 같은 고대의 현인들은 이를 잘 알고 진리를 숨겨놓았지만 경망스러운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자유주의의 확산과 함께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상대주의, 허무주의가 판을 치면서 도덕이 무너졌다. 사회도 함께 무너질 운명이다. 서구문명은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고전 정치철학으로의 복귀'다. 대중들에게 또다시 '고귀한 거짓말'을 해서 도덕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따라서 스트라우시언들이 진리, 정의, 도덕 운운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와 함께 정치공동체는 강력한 적의 존재에 의해 각성되고 유지된다. 적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역시 '고귀한 거짓말'이다."

 

p.93~94

'그 자체로 옳은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각자의 이기적 이익추구일 뿐이다. 그것이 '진정한 정의'다. 그리고 진정한 정의는 보통 부정의라고 불리는, 각자의 이기적 이익추구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정의'라고 불리는 것들은 나를 이롭게 하는 '친구'를 이롭게 하고 나를 해롭게 하는 '적'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폴리스의 공동의 좋음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오므로 그것은 강도 패거리들의 공동의 좋음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용문의 끝 부분이 압권이다. '최고의 기술인 통치자의 기술은 전쟁의 기술이라는 말'은 국가나 강도 패거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국가가 경우에 따라서 강도짓을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스트라우스의 이러한 냉혹한 입장은 그의 책 전반에 걸쳐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인 네오콘들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킬 때 그들의 마음속에 '정의'에 대한 이런 시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울포위츠의 선제공격론이나 예방전쟁론, 임기응변적 동맹 개념은 이러한 '정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즉, 미국의 이익과 다른 나라의 이익이 우연히 일치한다면 '서로 이익을 나눠갖는 정의'가 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의'는 있을 수 없다.

 

원래의 주제인 '밀교적 가르침'으로 돌아가보자.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와 논쟁하기 이전에 폴레마르코스와 대화를 했다. 이 대화의 결론은 '정의는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정의'였다. 이는 '정의'는 이기심에서 나온다는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질적으로 트라시마코스의 명제와 같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결국 속으로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한 것이 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이 대화편을 구성한 플라톤의 의도는 이렇다. '멍청한 대중들이 대화편을 읽으면 소크라테스가 논쟁에서 승리했다고 여기고 그 자체로 옳은 정의가 있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교훈을 얻고 착하게 살아갈 것이지만, 똑똑한 엘리트들이 주의깊게 읽으면 사실은 소크라테스나 트라시마코스가 같은 입장이며 그들의 결론은 정의는 없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p.97

보통의 독자들은 플라톤을 읽다가 그런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옛날 사람들이 정말 한심하구나'라든가 '플라톤 할아버지가 또 횡설수설하는구나'라든가 '누가 필사하다가 잘못 옮겼겠지'하고는 넘어가버리기 쉽다. 그러나 스트라우스의 입장은 반대다. 플라톤 같은 뛰어난 철학자가 일반 독자들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실수를 범했을 리가 없다. 만일 실수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플라톤이 일부러 그런 것이다.

 

플라톤 같은 위대한 영혼은 자기 자신이 쓴 작품을 전지전능할 정도로 정교하게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이 무조건 옳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 플라톤의 텍스트를 '빗자루로 쓸듯이' 샅샅이 분석해야 '행간에 숨어 있는 참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마음대로 이해하는 플라톤이 아니라 플라톤 자신이 이해했던 대로 플라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플라톤이 넌지시 혹은 우물쭈물 말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플라톤의 진짜 가르침일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이 여기서 무엇을 말했나'보다 '플라톤이 여기서 무엇을 말하지 않았느냐'에 더 주목해서 살펴봐야 진짜 가르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여기서는 이 말을 했다가 저기서는 저 말을 한다면 둘 중 하나는 진짜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p.113~115

고대의 정치철학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처럼 정치생활의 목표는 '덕성virtue의 함양'이라는 공통의 합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이런 전통적인 목표를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라 여기고 이를 거부했다. 그는 대신 목표를 낮춰잡았다. 그는 군주는 도덕에 신경쓰느라 정치를 망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정치와 도덕은 분리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가 이렇게 일을 저질러버리자 이후의 근대 정치사상가들도 이 길을 따라 정치와 도덕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탄탄한 근거를 갖추엇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전적으로 새롭다'고 비꼬면서 면박을 준다.

 

이런 정치는 결코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시켜버리면, 도덕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 어리석은 대중들도 도덕을 버릴 것이고 이들 어리석은 대중들로 구성된 사회는 질서를 상실하고 만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를 '악마의 교사'라고 지칭했다.

 

마키아벨리는 고대의 저술가들이 몰래 가르치거나 혹은 마지못해 가르친 불순한 교의doctrine를 공개적으로 혹은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는 고대 저술가들이 그들이 설정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말한 충격적인 것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말한다. 오직 마키아벨리만이 감히 그 사악한 교의를 자신의 책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말했다.

 

고대의 저술가들이 몰래 가르친 '불순한 교리', '충격적인 것'은 "그 자체로 옳은 정의는 없으며 정의라고 불리는 것들은 모두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다"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말한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비난은 계속된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전 저작을 통해 나타난 인간본성과 인간사에 대한 올바른 관찰들 가운데 고대의 저작들에서 전혀 생소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트라우스는 판단을 내리기를, 인간본성과 인간사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찰은 올바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트라우스 자신도 마키아벨리에 동의한다는 말이다. 다만 플라톤처럼 몰래 속삭이면서 말해야지 마키아벨리처럼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결국 스트라우스가 마키아벨리를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너무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순진하기 때문이다.

 

순진한 마키아벨리가 도덕을 정치와 분리해버림으로써 근대 사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의미다. 스트라우스는 비록 최선의 레짐에 대한 실현 가능성이 아주 낮더라도 이와 관계없이 최선의 레짐은 레짐들의 기준, 정치생활의 기준으로서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사회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p.288-289

스트라우스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현명함' 혹은 '영리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니체처럼 진리가 없다고 본다면 남은 것은 유용함밖에 없다. '현명함'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들은 어리석고 저속하다. 대중들이 권력을 장악한 민주주의, 혹은 대중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레짐이다. 어리석은 대중들이 투표를 해서 현명한 사람들을 뽑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현명함'은 무엇일까? 스트라우스가 보기에 현명함은 대중들과 민주주의의 어리석음을 이용해서 어리석음이 낳을 위험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현명한 엘리트들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해서 어리석은 대중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자유는 타락할 자유, 즉 방종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종교와 신화에 기반한 절대적인 가치들을 깨버림으로써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확산시키고 대중들의 타락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소리 높여 외칠 수도 없다. 그러면 자유를 좋아하는 대중들이 박해할 것이고 대중들은 현명한 철학자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현명함'은 대중들의 편견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서서히 몰래 조금씩 사회에 존재하는 해로운 자유를 없애나가는 것이다. 

 

p.310-311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스트라우시언들의 포퓰리즘 전략이 정말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포퓰리즘 전략은 깅그리치에게 전대미문의 정치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깅그리치의 정치생명을 빼앗은 것도 바로 그 포퓰리즘 전략이었다. 깅그리치는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는 데 실패해서 타격을 입었고 클린턴 탄핵에 실패했다. 깅그리치가 주는 교훈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대중들이 선전과 선동에 잘 속아넘어가기는 하지만 그들은 정치 엘리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바보가 아니다. 어떤 엘리트들의 눈에는 민주주의가 어리숙하고 만만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 민주주의는 무서운 역습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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