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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병자호란 1

by Diligejy 2017. 4. 30.

p.4~5

1675년(숙종 1) 봄, 만주 벌판을 달려온 한 사내가 압록강의 중강中江에 도착했다. 사내의 이름은 안단安端. 청나라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향하던 도망자였다. 그의 역정은 기구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안단은 청군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가 된다. 그리고 1644년, 청이 북경을 차지하자 자신의 주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한다.


1674년, 오매불망 고국으로의 귀환을 열망하던 안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주인이 북경을 비웠던 것이다. 1673년 오삼계吳三桂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남이 혼란에 빠지자, 안단의 주인은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강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안단은 탈출을 감행한다. 물경 38년 만의 시도였다. 북경을 출발하여 산해관을 통과하고 심양을 거쳐 만주 벌판까지 무사히 가로질렀다. 탈출의 성공을 눈앞에 둔 안단은 의주의 조선 관리들에게 입국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행운은 안단을 외면한다. 공교롭게도 의주에는 마침 청나라 칙사들이 입국해 있었다. 의주부윤 조성보趙聖輔는 안단의 사연을 칙사들에게 알렸고, 칙사들은 안단을 묶어 봉황성으로 압송해 버린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끌려가면서 안단은 절규했다. '고국이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고 말이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던 안단은 어찌 되었을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이 불쌍한 궁조窮鳥를 보듬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단의 기막현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병자호란이 남긴 고통의 그림자가 길고도 길었음을 새삼 절감한다.


p.77

우여곡절 끝에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인조 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의 난맥상 때문에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한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이괄의 반란으로 인조 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당장 반란을 진압하느라 군사적 역량이 크게 소모되었다. 반정 성공 직후 내세웠던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던 호기는 물거품이 되었다.

인조가 서울을 떠난 직후 난민들이 궁궐과 관청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공사의 기물들을 약탈했다. 각종 서류와 문서, 양곡 등이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각 관청에 보관된 무기류도 대거 약탈되었다. 이원익의 증언에 따르면 "변란을 겪은 이후 군기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훔쳐 간 조총의 수량이 워낙 많아 그것들을 쌀을 주고 도로 사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p.82
이괄의 난 이후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어영군과 총융군을 창설하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도성과 수도권 방어에만 치중하는 와중에 적의 주요 침입로인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방어는 몹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이괄의 난 이후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정권 안보'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성공헀지만 '국가 안보'의 기반은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그것은 분명 당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던 그들의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p.85
1625년 2월, 인조를 책봉하기 위해 명나라 사신 두 사람이 조선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 정권이 고대하고 고대했던 낭보였다. 그동안 명 조정은 치일피일 책봉을 미루면서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속을 태웠다. 인조 정권은 명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까지 겪었다. 만일 당시 이괄이 도성을 계속 장악한 채, 자신이 추대했던 흥안군을 새 국왕으로 책봉해달라고 명에 요청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 조정은 필경 인조 정권이나 '흥안군 정권' 모두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 어떤 정권을 승인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책봉을 받지 못한 데다 이괄의 난까지 겹쳐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인조 정권은 책봉사 일행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몹시 고무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뿐, 책봉사 일행을 접대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해야 했다. 더욱이 책봉사로 오는 환관 왕민정과 호양보는 '대단한'인물들이었다. 두 환관은, 당시 명 조정을 사실상 주무르고 있던 환관의 수괴 위충현魏忠賢에게 뇌물을 바치고 조선행을 자원한 자들이었다. 조선에 가겠다고 나선 것은 은과 인삼을 뇌물로 받아 한 밑천 단단히 챙기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왕민정은 부모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조선행을 강행했다.

p.86
조선은 바짝 긴장했다. 1625년 2월, 호조는 책봉사 접대에 필요한 은과 인삼의 수량을 각각 10만 냥과 수천 근으로 추산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각도의 토지에서 매 4결마다 베 1필을 거둔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백성들에게 커다란 고통이 돌아가는 조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호조는 모문룡에게 은3~4만 냥을 빌리되 나중에 미곡과 인삼으로 상환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명 사신 접대를 위해 명 장수에게서 은을 빌려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빚어졌다.

p.90
인조 정권은 '광해군대의 난정亂政을 바로 잡겠다'며 등장했다. '난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광해군이 모후를 폐하고 아우를 죽임으로써 폐륜을 자행했다'는 것,
둘째 '궁궐 건설 등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것,
셋째 '오랑캐 후금과 화친하여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집권 직후 인조 정권은 위의 세 가지 개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착수해야만 했다.

p.91~93
인조 정권은 집권 직후 광해군대 폐모 논의 등에 가담했던 '난신적자'들을 숙청했다. 또 대규모로 벌였던 궁궐 공사 등에 필요한 재원과 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사족과 백성들을 침학했던 조도사들을 처형했다. 조도사란 임시로 파견된 어사를 가리킨다. 아울러 광해군대 난립했던 각종 도감(임시 기구)들을 철폐하고, 재성청裁省廳을 설치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재성청을 설치한 것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재성裁省'이란 백성들에게 과도하게 부과된 세금 부담을 '살펴서 덜어 낸다'는 뜻이다. 당시 백성들은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을 쌀로 납부하고, 군역軍役과 요역을 자신의 노동력으로 충당하고, 왕실과 중앙 정부와 지방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자들을 현물로 납부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백성들이 가장 부담스러워 했던 것은 공물이었다. 토지세는 납부하는 횟수가 정해져 있지만, 공물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부과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동법이란 공물을 현물이 아닌 쌀로 바꾸어 내되, 그 납부 횟수와 수량을 제한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획기적인 개혁안이었다. 최근에 나온 탁월한 연구에 따르면 대동법의 실시를 통해 조선 후기 백성들은 이전보다 약 80퍼센트의 세금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 직후 선혜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실시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시 지역이 경기도에만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저런 반대에 밀려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인조반정 직후 호조는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실시하되 봄가을로 토지 1결당 10말씩 쌀을 거두면 60만 석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원익, 조익 등이 대동법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조정은 1623년 9월 삼도대동청을 설치했다. 바야흐로 인조 정권의 '개혁 표방'이 실현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대동미를 운반하는 조운선이 자주 침몰했던 것, 충청도와 전라도 백성들이 쌀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운반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또 대동미 부과의 기준이 되는 토지 결수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아 지역에 따라, 계층에 따라 부담이 불균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 바치는 공물은 대동미를 납부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왕실 등에서 구하는 진상 물자, 지방 관청에서 필요한 물자 등은 별도로 다시 현물로 거두는 상황이 빚어졌다. 대동법 실시의 본래 취지로 보면 중앙 관청에 납부할 공물, 왕실에 납부할 진상품, 지방 관청에 납부할 공물 등의 부담이 대동미를 두 차례 납부함으로써 완전히 해소되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실시 초기에 대동미 징수액을 산정할 때 왕실 진상물과 지방 관청 공물로 충당할 비용을 누락시키는 실수가 나타났다. 누락되어버린 왕실과 지방 관청의 공물 비용을 나중에 추가로 징수하게 되자 백성들은 이중 부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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