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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46

내게 무해한 사람 p.97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그네를 타도, 공상에 빠져 이야기를 지어내도, 자신들이 작가이고 감독이고 배우이고 관객인 연극을 해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거리까지 달려간다고 해도 메워지지 않았던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지나가는 밤 中 p.99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2019. 3. 17.
회색인간 p.32 "통조림 몇 개 때문에 한 노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저희는 짐승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노인을 살려주고 나니, 그제야 저희는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이 되어 잇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살았습니다." [무인도의 부자 노인] p.48~49최 기자의 아내는 괴롭게 울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약속했잖아? 당신 분명히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미안해..."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 스트레이트 씨가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우리 애를 구하려다 그렇게 된 건데! 당신이 어떻게 그분을 아웃팅시킬 수 있어?" "난 기자야! 난 비밀을 가질 수 없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욕해도 할 수 없어, 그게 내 기자로서의 사명감이고 내가 지닌 기자 정신이야." "기자 정신? 웃기지 .. 2018. 4. 10.
비행운 p.14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답한 것은. 너의 여름은 어떠니 中 p. 2018. 3. 20.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p.39 잔인한가. 그렇지 않다. 개인적인 삶이란 없다. 우리의 모든 은밀한 욕망들은 늘 공적인 영역으로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리병에 갇힌 요괴처럼, 마개만 따주면 모든 것을 해줄 것처럼 속삭여대지만 일단 세상 밖으로 나오면 거대한 괴물이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그들이 묻는다. 이봐. 누가 나를 이 호리병에 넣었지? 그건 바로 인간이야. 나를 꺼내준 너도 인간. 그러니까 나는 너를 잡아먹어야 되겠어. 사진관 살인사건 中 p.86나는 이런 CD가 좋다. LP의 추억 따위를 읊조리는 인간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LP의 음은 따뜻했다고, 바늘이 먼지를 긁을 때마다 내는 잡음이 정겨웠다고 말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이들은 잡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잡음에 묻어 있을 자신의 추억을 사랑하는 .. 2018. 3. 20.
한국이 싫어서 p.12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p.25젊은 남자들이 「고해」노랫말에 빠지는 이유는 알 것 같아. 예쁜 여자들이 자기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니까 좌절감이 들 거 아냐. 그 좌절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자뻑의 길을 택하는 거지. 그게 된장녀 어쩌고 하며 못 먹는 감에 돌 던지는 못된 심보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2018. 3. 3.
사랑의 생애 p.9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p. 2017.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