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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46

성에 p.15 친구는 그 선배와 공유했던 추억들, 그들 사이에 오갔던 은밀한 시선과 사랑의 기호들, 터무니없이 큰 의미를 부여한 사소한 기억들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부풀려진 흔적이 역력했고, 실재했던 이야기라기보다는 친구의 내면에서 희구해온 환상에 가까워 보였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친구의 애통함은 선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환상을 잃는다는 상실감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어차피 환상 속 사랑이라면 그 대상의 실체나 생존 여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려다가 연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환상에 대해 생각할 때 진심으로 궁금한 사항이었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순간 치명적인 폭력이 될 것 같았다. p.18 그것을 '알아본다'.. 2022. 5. 23.
빛의 호위 p.13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 2021. 12. 28.
환한 숨 p.96 그녀의 말은 모두가 공평하게 비정하다면 한 사람의 비정은 모두의 비정으로 희석된다고, 세상 어디에도 더 비정한 비정은 없다고, 그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p.97~98 "얼마 전에 무슨 시민 단체에서 일한다는 분이 병원에 찾아와서 그러데요. 이 사회가 하나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요. 그런가요, 선생님?" "......" "근데요, 그거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내가 못나서 하나가 저렇게 된 거예요. 고등학교 중퇴에 미혼모에, 나 좀 못난거 맞잖아요." "하나 어머님, 약한 생각은 하지 마시고....." "약한 게 아니고요, 내 현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나 솔직히 하나가 인문계 대신 취업 잘 되는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 고마웠어요. 미안한 건 잠깐이고 오래오래 고맙더라고요. 하긴, 선생님 같은.. 2021. 12. 27.
해피 붓다 https://coupa.ng/cbmCwP 해피 붓다 COUPANG www.coupang.com p.26~27 만약 지금의 우리가 당시의 독일 상황인데 히틀러 같은 괴물이 나타났다면 나치에 환호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보통의 경우 악마는 환란과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강림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어두운 마음이 보고 싶어 하는 딱 그 거울인 것이다. 히틀러가 어디 먼 데 있는 게 아니다. 책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인지 모르는 사람은 혁명 같은 것을 논할 자격이 없다.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p.37~38 잽을 계속해서 허용하면 골리앗도 결국 맛이 가게 돼 있다. 스트레이트, 어퍼컷, 훅보다.. 2021. 12. 22.
지구에서 한아뿐 https://coupa.ng/b6ZCuk 지구에서 한아뿐:정세랑 장편소설 COUPANG www.coupang.com p.118 백날을 생각해봤자 답은 똑같을걸요.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 분명한 문제에요. p.145 흥미로운 것은 경민의 가족들도, 대단한 우정을 과시하던 친구들도 경민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한아는 그 부분에서 솔직히 섬뜩함마저 느꼈다. 완전히 태양계 밖으로 사라졌는데, 전혀 다른 존재가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알아차린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니. 원래의 경민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경민은 어머니를 일찍 잃었고, 아버지는 최근에 재혼하셔서 아직 적.. 2021. 9. 9.
산 자들 https://coupa.ng/b4epEJ 산 자들 / 민음사 COUPANG www.coupang.com p.40 "그건 자기도 몰랐잖아." "뭘?"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걔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 본 적 없잖아?" p.67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본사가 티앤티와 영업양수도계약을 체결한 순간 그들에게는 티앤티에서 모욕을 당하든지 본사에 남아 모멸을 겪든지 이 두.. 2021. 7.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