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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46

디 마이너스 p.9기억은 스스로 사라진다. 파괴는 불가능하고 분실이 최선이다. 왜 잊으려 애쓰는가?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었음을 깨닫는가? 되찾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기억의 종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개와 같다. p.10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죄는 용서해도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p.15겸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어야 하지, 단어를 선택하며 발휘하는 게 아니다. p.37아이에게 신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 편이 나을 거야. 정말로 교회에 복수하고 싶다면. p.143과거 국내 최대의 자동차 기업이었던 대우자동차가 부도를 맞았다. 해외 시장으로 무리한 확장을 시도했던 게 화근이 됐다. 먼저 몸집을 부풀려야 몸집을 키울 힘도 생긴다는, 김우중 회장의 독.. 2017. 8. 14.
스파링 p.10모르겠지. 세상 편하게 모르고 있을 터였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떠벌리는 족속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아는데, 인간이 언제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그놈들부터 차례로 줄을 세워 목을 날려버려야 한다. 모르는 놈과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놈들이 힘을 합쳐 이 세계를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p.11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 2017. 7. 10.
공터에서 p.46~47터져 나오는 울음과 울음을 누르려는 울음이 부딪치면서 울음이 뒤틀렸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울음이 몸 속에 쟁여진 울음을 끌어냈다. 몸 밖의 울음과 몸 안의 울음이 이어져서 울음은 굽이쳤고, 이음이 끊어질 때 울음은 막혀서 끽끽거렸다. 그 울음은 남편과 사별하는 울음이 아니라, 울음으로써 전 생애를 지워버리려는 울음이었으나 울음에 실려서 생애는 오히려 드러나고 있었다. p.64~65.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기억은 바래어져서 현실감이 없었지만, 임박한 죽음보다 더 절박하게 마동수를 옥죄었다. 2017. 5. 27.
달콤한 나의 도시 p.17~18 일부일처제 사회의 위대한 규칙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할 수도 있다. p.53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p.5925세의 여자를 부러워하는 건 탱탱한 피부 때문이 아니다. 내 질투의 이유는, 그녀의 무모한 용기가 수틀리면 쉽게 손 털고 첨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자의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p.95오래된 친구 사이가 자꾸만 삐거덕대는 건, '잘난 척해봐야 나는 네 밑바닥을 다 안다'는 오만한 자세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17. 3. 7.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p.56 우리가 문학이란 이름으로 행해온 비판적 지성의 모든 것들이 어딘가 보일 듯 말 듯한 과거의 것으로 숨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공동의 문제, 우리 공동의 명제, 우리 공동의 전망이 이렇게도 가위로 오려낸 듯이 사라져버릴 수 있단 말인가. p.62가족들이 확실히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나 하나 줄어들어 문득 나 혼자 여기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 같다.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이렇게 나만 남게 되었다. 정말 SF다. 우주의 어둠이다. p.87해체된 소련 연방, 샅샅이 토벌되는 오르그의 사람들, 모스크바의 식량 폭동, 강남의 휘황한 불빛-기고만장한 졸부들의 축제, 천안문의 학살, 미국의 역겨운 미소, 저 거대한 절벽에 얼어붙은 우리들의 찌.. 2016. 10. 16.
방각본살인사건 p.62 진정한 벗 한 사람을 얻게 된다면 십 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일 년간 누에를 쳐서 오색 실에 물을 들이겠소. 열흘에 한 빛깔씩 만들어 쉰 날 동안 모두 다섯 빛깔 실을 준비하겠소이다. 이 실들을 다시 봄볕에 쬐어 말린 다음 아내에게 그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겠소.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높은 산과 아득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 펼쳐 놓고 마주보며 한나절 말없이 있다가 황혼이 들면 품에 안고 돌아오고 싶소이다. 2016.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