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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73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N잡 일지 p.6 그 삽질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글을 씀으로써 나는 작가가 되었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고, 외국어를 옮김으로써 번역가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심정으로 시작한 N잡이었지만, 내가 벌인 일의 진짜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일을 주는 사람이나 회사가 아니라 일 그 자체였다. 나는 원하는 직업을 스스로 가질 수 있고, 일의 내용이나 방식 또한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2023. 9. 4.
법관의 일 p.11~12 법은 사건의 필연을 이해하는 데 대체로 실패하지만, 최소한의 책임을 규명하는 일만은 그럭저럭 해낸다. 누군가는 이 모든 일이 부질없는 일이라 말할지 모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비아냥댈지 모른다. 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고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러나 하등의 필연적 이유 없이 그럴 수 있을 법한 일들로 가득찬 이 세계에서 뒤늦게나마 기대어 호소할 수 있는 법이라도 없다면 더없이 적막하고 쓸쓸하지 않을지. 법은 이 세상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그럴 수 있는' 일들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승인하길 거부한다. 이미 벌어진 일의 사실성을 부인할 순 없어도 그 일의 당위성을 문제삼고 끝내 부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법의 힘이다... 2023. 8. 18.
수학의 위로 p.8 아이의 호기심, 아이가 넓은 세계의 이모저모와 돌아가는 양상을 나름의 논리를 써서 이리 꼬고 저리 꼬고 하면서 풀어나가는 모습이야말로 어른이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p.10 "아들, 삶은 원래 공평하지 않아. 고모는 나쁜 짓을 해서 병에 걸린 게 아니야. 그냥 걸린 거야.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일어나. 우리는 그저 좋은 일이 좀 더 많이 일어나고 나쁜 일이 더 적게 일어나도록 노력할 뿐이야.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니까, 다 손쓸 수는 없어." p.15 성격과 관심사가 딱 들어맞아서, 부러울 만치 후회나 재고할 일 없이 흡족한 삶을 사는 이들도 있긴 하다. 몇몇 선택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우리를 이끌곤 한다. 지금 경로를 바꾸어도, 이후의 삶은 여러 .. 2023. 8. 4.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p.28 외상을 입은 뇌에 구멍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무척이나 매혹적인 경험이었음을 여기서 밝혀두고자 한다. 한때 중요해 보였던 세상사가 이제는 보잘것없게 여겨졌다. 그 보잘것없는 세상의 일에 나를 얽어매던 재잘거림이 멈추고 침묵이 찾아왔다. 이제 신경의 초점을 내부로 돌린 나는 신체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 개의 똑똑한 세포들이 힘을 합쳐서 열심히 일하며 내는 규칙적인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가 뇌 사이로 흘러들자 내 의식이 서서히 속도를 줄여 거대하고 멋진 세상을 품 안에 끌어안으며 차분하고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내 물리적 존재를 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작은 세포들이 매 순간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느꼈다. 그 사실 자체에 매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겸허한 마음이 찾아왔다. 2023. 7. 30.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p.9 희망은 답이 아니다.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 p.10-11 인간에게는 희망이 넘친다고, 자신의 선의는 확고하다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해맑게 웃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p.19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 2023. 4. 29.
이건희 에세이 -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p.15 한국반도체를 실제로 조사해 보곤 실망이 컸다. 이름만 반도체지 트렌지스터나 만드는 수준이었다. 언제 LSI(대규모 집적 회로), VLSI(초대형 집적 회로)를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더구나 한미 합작이어서 인수한다 하더라도 여러 제약이 많을 것으로 예상됐다. 상당한 고민 끝에 인수를 결심했다. 전자 산업뿐만 아니라 자동차, 항공기 등의 분야는 핵심부품인 반도체 기술 없이는 불가능한 데다, 한국반도체를 종자로 국내 하이테크 산업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p.19 지금은 고임금, 고물가, 고기술, 고무역장벽, 고환율 등 5고 시대다. 이런 때일수록 공격적 자세가 필요하다. 창조적 발상이 결집된 상품과 서비스를 남보다 앞서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p.20 80년대 후반 .. 2023.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