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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73

지독한 하루 p.12 과학의 순간이지만 유일하게 과학의 손에 맡길 수만은 없는 그 순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불분명한 분절에 선을 그어 그를 망자로 만들고 무조건 슬픔을 들이켜야 하는 순간, 나는 앞으로도 그 순간의 명명을 언제나 고민하고 고뇌하게 될 것이다. p.18"급성심근경색은 5분 내에 전화 주시기로 하지 않았나요? 이 사람 온 지 한 시간이나 됐습니다.""죄송합니다. 간암 말기여서 암성 통증과 혼동했습니다.""아니, 명치가 아프다고 했으면 그건 심근경색의 주요 증상인데, 심전도부터 확인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죄송합니다."심장만 보는 주치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몇 백명의 환자가 계속 몰려와 각종 증상을 늘어놓는 응급실에서는 필연적인 우연처럼 이런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p.46~.. 2017. 8. 7.
유혹의 학교 (5) p.256~257때로는 명징하게 찾아오는 끝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마지막도 있다. 사랑이 저물었다는 사실이 돌연 찾아오는 깨달음처럼 혹은 패전의 선포처럼 찾아올 때가 있다. 당장의 인연이 마감되었다고 하여 상대방을 미워할 이유는 없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사랑했던 시간을 너무 사랑해서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함께 사랑했던 시간 속 우리가 존재하기를 멈췄을 따름이다. 살아남지 못한 대신 새로운 우리가 탄생했을 뿐이다. 새로운 탄생을 당장은 축복하기 힘들겠지만, 존재의 죽음을 애도하되 미워할 이유는 없다. 왜냐면 소멸된 존재에는 내가 그를 사랑했던 모든 이유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새로이 생성된 존재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는 이미 나를 사랑했던 예전의 .. 2017. 7. 27.
유혹의 학교(3) p.91~92 사람도 세상도 변화하는 것이 이치이다. 그리고 함께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나뿐 아니라 세계의 변화를 끌어안고 참여한다고 느낄 때 인간은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다. 세계의 고통을 나의 불행으로만 이해하고 혼자 침잠하고 있을 때 나는 허우적거린다. 내게는 광장에서 그의 손을 마주잡은 이른 봄날이, 그가 사준 호떡을 베어 문 순간으로부터 소급된,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부디 광장으로 나아가는 유혹과 연애를 하길 바란다. 함께 세계를 열고 변혁하고 모두가 성장하는, 그래서 유혹의 비용이 화폐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으로 다가가는. p.99만나자고 말하기까지 몇 달이 걸렸잖아. 오기 전까지 정말 망설였고 또 두려웠어. 나는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야.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 2017. 7. 26.
유혹의 학교(2) p.61~62결핍을 안고 세상에 도착한 인간은 최초의 분리 대신 최초의 유혹을 선물받는다. 유혹은 경계의 형성과 함께 시작한다. 나와 너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첫 번째 경험은 엄마의 몸으로부터의 분리일 것이다. 따뜻한 자궁을 벗어나서 자신의 존재를 외부로 내던지는 절박함은 어미의 따스한 손길과 눈빛으로 보상받는다. 어미는 넉넉한 품과 먹이로 아이를 유혹하고 아이는 보드라운 살갗과 온전한 내맡김으로 어미를 유혹한다. 그 자체로 완결된 유혹의 자장이 무너지는 것은 아이의 성장이요 어미로부터의 분리요 또 다른 세상의 발견이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유혹의 기술을 깨닫고 익히고 발휘한다. 유혹자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고 유혹의 활동에 당연해지는 것은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고유한 매력은 .. 2017. 7. 26.
유혹의 학교 p.5 여자는 생각만큼 도덕적이지 않다. 유혹할 줄 모르는 남자를 도덕으로 외면할 뿐. p.12유혹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양 함께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듯 함께 가고,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양 함께 듣고 새기는 일이야. 마치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듯이. 그야말로 생의 감각이 폭발하듯 살아 오르는 가장 관능적인 순간이 아닐까? p.16이곳은 모든 관계가 유혹에 기반을 뒀다고 생각하는 사회야. 서로를 유혹하고 유혹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하지. 눈앞의 결과를 위해서만 유혹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서 유혹한다고나 할까.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한 관계 형성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부족하면 섭섭함을 느낄 정도지. 유혹은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하는 태도이기도 해. 부담스러우면 당연.. 2017. 7. 25.
나는 오늘도 하드보일드를 읽는다 p.51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타고난 운이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운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결정된 영화 같은 것은 아닐 게다. 겨울이 와도, 여름이 와도 저마다 모양은 다르다. 누군가는 혹독한 겨울에도 굳건하게 살아남는다. 누군가는 몸서리치다가 얼어 죽기도 한다. 똑같은 시련이 주어져도, 많은 경험을 통해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고 힘을 기른 후에 맞이하는 시련은 다르다. 그러니까 시련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자신이 어떻게 나아갈지를 선택하는 것. p.61히라타도 마스미도 자신의 운명에 맞서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그것이 끔찍한 진실이건, 화사한 거짓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선택에 후회는 없.. 2017.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