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3~24
근대 이후 역사 무대에서 시대를 풍미한 패권국으로는 포르투갈(15세기 말~16세기 중엽), 스페인(16세기 초~17세기 초), 네덜란드(17세기), 프랑스(17세기 말~18세기 전반), 영국(19세기),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패권적 지위를 유지해 온 미국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고 이에 도전하는 국가가 패권을 이어받는 과정에서는 대개 큰 전쟁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나폴레옹 전쟁(1803~1815년)이 그러한 전쟁이었다.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지배를 꿈꾸며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프랑스는 신흥 도전국 영국과 그 연합 세력에 의해 저지당했고, 이후 유럽의 패권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넘어갔다.
20세기 초중반을 강타한 두 차례의 세계 대전도 이러한 권력부침의 파생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녀)은 19세기의 패권국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1871년 통일 이후 급속히 성장한 신흥 도전국 독일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p.25
p.27~30
'안목'과 '전략적 사고'는 강대국보다 약소국에 더욱 절실하다. 역사에는 국제 정치의 판을 정확히 읽어내고 대응하는 데 실패해서 희생당한 약소국이 수없이 많다. 단적인 예로 강대국들에 의해 네 차례 분할되고 점령당한 끝에 지도에서 사라졌던 폴란드를 들 수 있다. 원래 폴란드는 1569년 폴란트-리투아니아 연방을 수립한 이후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절정의 국력을 과시하던 중부 유럽의 강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래 수많은 전쟁과 국내적 혼란을 겪으며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라는 세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지속적으로 서쪽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는 이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와 전쟁을 불사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프로이센은 전쟁의 불꽃이 자국에 튀는 것을 막기 위해 두 나라의 세력 경쟁이 폴란드 땅에서 일어나도록 유도했다. 애석하게도 폴란드는 국가적 위기가 임박한 순간까지 주변 국가들의 의도나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고 현명한 외교노선을 채택하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폴란드는 내부 분열에 휩싸여 외국 세력에게 자국을 침공할 단초를 제공했다. 세 강대국은 폴란드의 영토를 각각 나누어 차지함으로써 세력 경쟁을 완화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내란과 러시아의 침공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린 끝에 1772년 영토의 3분의 1을 강탈당하고 말았다(1차 분할).
그로부터 20년 후 폴란드의 지도층은 국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새롱누 헌법을 제정했다. 그런데 이것이 또 하나의 빌미가 되었다. 국내의 보수파는 그에 반발해 내부 투쟁을 벌이며 러시아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가 움직이자 프로이센도 군대를 파견했다. 헌법을 가결했던 폴란드 의회는 외국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이는 마치 구한말 동학 혁명 이후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 전쟁의 상황과도 비슷했다. 결국 1793년 폴란드는 남은 영토의 절반마저 또다시 빼앗기고 말았다(2차 분할).
2차 분할 이후 분노한 폴란드 국민들은 전국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주변 삼국은 오히려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폴란드에 군대를 파견했고, 폴란드는 이들 군대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고 말았다. 1795년 세 강대국은 폴란드의 남은 영토마저 분할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123년 동안 폴란드는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3차 분할)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폴란드는 잃었던 주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와중에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흥정의 대상이 되어 다시 한 번 희생되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했고 이어서 9월 17일 소련군이 동쪽에서 쳐들어 왔다. 같은 달 27일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됨으로써 또다시 지도에서 사라졌다(4차 분할).
p.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