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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유혹의 학교

by Diligejy 2017. 7. 25.

p.5

여자는 생각만큼 도덕적이지 않다.
유혹할 줄 모르는 남자를
도덕으로 외면할 뿐.


p.12

유혹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양 함께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듯 함께 가고,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양 함께 듣고 새기는 일이야.
마치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듯이.
그야말로 생의 감각이 폭발하듯 살아 오르는
가장 관능적인 순간이 아닐까?


p.16

이곳은 모든 관계가 유혹에 기반을 뒀다고 생각하는 사회야. 서로를 유혹하고 유혹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하지. 눈앞의 결과를 위해서만 유혹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서 유혹한다고나 할까.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한 관계 형성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부족하면 섭섭함을 느낄 정도지. 유혹은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하는 태도이기도 해. 부담스러우면 당연하게 거리를 두고 필요하다면 딱 부러진 거절도 할 수 있는 거야.


p.17

문화에 따라 표현 방식과 허용 범위가 달리지곤 하지만, 유혹은 인간이 그 기원에서부터 함께해온 활동이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곳곳에 존재한다. 금기와 위반, 파멸의 도색성으로 치장되었을지라도 한 꺼풀 벗겨보면 또 다른 서사가 있다. 위반은 기쁨을, 파멸은 생성을 이끄는 텍스트가 된다. 그녀가 말했다.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뱀과 이브의 유혹이 없었더라면 인류에게 이토록 풍요로운 문명이 가능했겠느냐고. 유혹에 굴복함과 동시에 인간은 신의 종속에서 벗어났다. 주어진 천국을 떠나 주체적 존재를 향한 길에 한 발짝 들어선 것이다.


p.19

만남과 헤어짐이 오고가는 이곳의 삶은 유혹의 수업을 치르는 학습의 터전이다. 유혹은 상대의 매력은 물론 자신을 발견하고 탐험하는 수업이다. 오랜 편견으로 자리잡은, 추락과 파멸이란 유혹의 수업료는 치르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삶과 함께 단련된 감각으로 소통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간다. 생명이 번식하고 문명이 꽃피워가는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유혹의 학교가 된다. 인간은 이미 진화의 과정을 통해 다른 생명의 유혹을 보고 듣고 배웠으며 그것을 인류만의 방식으로 발달시켜왔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유혹의 스승과 동지들로 넘쳐났다. 앞으로 살아갈 삶의 여정이 외롭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하니 든든해졌다.


p.31~32

유혹은 관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무모함은 낯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기가 죽어요. 처음 본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가 있을까요? 정글 속이라고 상상해봐요. 눈앞에 등장한 낯선 당신은 날카로운 비수로 나를 찢고서 손에 들린 식량꾸러미를 앗아갈지 모릅니다. 처음 본 사람만큼 신비로운 존재 또한 있을까요? 미지의 신세계처럼, 풍성한 과일 나무처럼 기대에 부풀게 해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마주한 순간 상대의 호의에 더욱 민감합니다. 자신을 알아보고 호감을 전해주는 상대에게 더 마음을 주게 됩니다. 이끌림이 강렬할수록 관찰의 농도는 짙어지지요. 자신도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면, 적당한 순간에 마음을 알려야 합니다. 다가감의 속도와 거리감의 너비를 조절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시선의 춤과 같지요. 오가는 눈빛이 길을 냅니다. 내밀하고 울창한 길일수록 더 오래 마음을 잡아둘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거침없이 뻗은 길은 되돌아가고 싶게 만들어요. 숨을 곳이 보이지 않는 길은 두려움을 자극합니다. 차라리 속살을 엿보이듯 우거진 숲을 열듯 둘만의 산책을 유도하듯 오솔길을 내는 편이 좋을 거에요.


p.37

모호함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알 수 없기에 생각하게 되고 생각할수록 마음이 머물게 된다.


p.37~38

유혹은 서사를 품고 있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단, 그 이야기가 풍경처럼 흘러서는 안 된다. 유혹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유혹당하는 자를 연기하는 편이 좋다. 상대의 존재에 매료되어 열리고 움직이는 공동의 서사가 현재형으로 진행 중임을 느끼게 해주면 좋다.


p.38~39

상대를 매력적인 개체로 인식하고 반응을 살필 때, 두 사람 사이의 일치된 반응을 가슴 졸이며 찾을 때, 만남은 하나의 사건으로 변모한다. 적어도 매혹당한 사람의 서사에서는 말이다. 만약, 적절히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건은 일방적 독백으로 끝나기 일쑤다.


우리는 관계 속 자신이 맡은 역할에 비통해지곤 한다. 의도를 비껴가며 터져 나오는 말이 야속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상대가 마음에 들수록 무뚝뚝한 태도나 어처구니없는 대응으로 일관하기도 쉽다. 약간의 비틀림이었는데 결국은 크게 어긋나서 달려가는 기차와도 같다. 트랙이 어긋나는 순간은 상대에게 과하게 잘 보이려 할 때, 과장된 자기방어 기제가 도드라질 때 자주 일어난다. 거부당할까 두려워 제3자를 향한 관심으로 가장하기도 하고 평소보다 쿨하고 무심한 사람인 척 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만남의 중심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지나치게 투영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유혹은 상대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면 좋다. 자신을 드러내는 속도가 상대를 발견하는 속도보다 앞서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에 매달리기보다 상대를 느끼고 이해하는 데 집중한다. 상대방이 당신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역할에 만족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이 그리는 자아상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자아상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것을 발견해주고 때로는 복돋아주는 편이 좋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 늦었다고 생각해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모든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자신감은 자신을 과시할 때가 아니라 실패했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일어설 때 필요하다. 유혹은 끝을 바라보고 가는 길이 아니라 현재의 가능성에 집중하는 행위다. 아직 유혹하지 않았음은 언젠가 유혹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p.40
유혹은 과정을 통해 관계의 성질이 어디까지 나갈 것인가 깨닫게 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알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각각의 시차를 둔 깨달음일 때도 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유혹하는 자에게나 유혹당하는 자에게도 필연적이지 않다.

p.41
유혹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곳으로의 문을 여는 초대의 행위이다. 그러나 당신을 구원하거나 그 세계에 영원토록 머물게 하겠다는 약속은 아니다. 유혹에서 사랑을 선불처럼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유혹은 관계의 적정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일이다. 삶의 좌표가 변하듯 관계의 좌표도 움직인다. 때로는 느리게,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말이다.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유혹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게 해준다.

p.55
피곤하다는 핑계로 배려는 차츰 줄어들었다. 무작정 엄마 말을 들어주는 아이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나와 다른 상대의 즐거움을 고려하지 않으니 내 즐거움도 사라졌다.

p.56~57
유혹에 전제가 되어야 할 것 역시 타자성의 발견이다. 상대가 나와 다름을 깨닫는 것,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대의 욕망을 살피고 탐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즐거움과 너의 즐거움이 만나는 자리를 고민하고, 어느 순간 우리의 즐거움이 부쩍 가까워진 것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은 유혹의 가장 큰 보상이다. 물론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은 두렵고도 지난한 과정이 되기도 한다. 거부당할까 두려워 도망가기도 하고 공격적 태도로 미리 무장하기도 한다. 유혹은 이와 같은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위험한 상대가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상대임을 설득하며 다가가고 또 상대를 자발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일이다. 설득은 상대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혹하다'라는 의미의 seduce라는 단어는 라틴어seducere에 연원을 두고있다. se는 away, 즉 떨어져 있음을 의미하고 ducere는 lead, 즉 이끈다는 의미다. 연결해보면, 떨어져서 이끄는 것을 말한다. 혹은 이끌어서 스스로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함부로 침범하고 윽박질러 끌어가는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자신의 틀을 나오게 하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전제가 되는 거리를 상대에 대한 존중이자 자율성의 공간이라고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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