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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개인주의자 선언

by Diligejy 2018. 2. 7.

p.8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하는 거다.


p.13~14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한상궁 마마님의 말씀이 있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시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p.41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MRI에 '뽀샵'을 하고 싶은 욕구가 앞설 때쯤이 글쓰기를 집어치워야 할 시기일 듯하다.


p.162~163

실제로 의미있는 변화를 도출하는 것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과격한 목소리들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반대의견을 가진 집단의 반발과 결속만 강하게 만들어 의견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한 진영 내부에 생기는 작은 균열에서 변화의 지점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같은 진영 내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고 부드러운 '다른' 목소리들이다. 작은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선거와 같은 큰 세력 다툼의 시기를 전후하여 집단 내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코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 슬쩍 다른 길로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창하고 근본적인 해결책만 고집하지 않고 당장 개선가능한 작은 방법들을 바로 적용했고, 작지만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켰다. 영웅은 이런 사람이 아닐까.


p.213

누가 당신에게 이익을 주고 누가 당신에게 손해를 끼치는지 정신차리고 보아야 한다. 내부고발자가 시민 이익의 대변자로 보호받고 보상받아야 권력자들이 긴장한다. 발각될 리스크를 고려해 넣도록 만들어야 대범한 도둑질을 못한다. 조심이라도 한다. 인간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감시다. 눈먼 의리가 아니다.


그나저나 우리나라는 정말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나라인가보다. 황우석 사건 보도 같은 대단한 일을 해낸 피디조차 방송 제작 대신 스케이트장 운영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니 말이다. 탁월한 피디가 남아돌거나 또는 시민들의 생활체육을 극도로 중시하는 것이리라.


p.229

인간사회는 참 묘해서 교과서처럼 정의가 늘 승리하지도 않고, 거기 앞서 무엇이 정의인지도 정의하기 어렵고, 분명히 선의에서 비롯한 정책이 오히려 사람들의 고통만 심화하기도 하고,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는 슬프지만 많은 격차가 있고, 빈곤과 불평등에는 사회가 책임질 부분도 있지만,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이런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뭔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훼손되는 것일까? 결국은 직시할 문제와 모색할 해결책 두 가지가 있을 뿐 아닐까?


p.234

정치적 목적으로 문명의 작동을 정지하면 인간이란 쉽사리 동물에 가까운 원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 본성이 90퍼센트 침팬지에 가깝다고 본다. 침팬지는 영장류 중 가장 포악하다. 영역권을 침범한 다른 무리 침팬지를 발견하면 떼로 공격하여 찢어죽여 먹어치운다.


p.239~241

흥미로운 부분은 미국과 유럽에서 폭력과 살인 발생률이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1960년대에 반전되어 다시 급증했다는 점이다. 68혁명과 플라워 무브먼트의 시대, 평화와 사랑의 시대의 역설이다. 기성 질서의 억압과 위선에 반발한 반문화counterculture혁명은 인간의 본원적 야만성을 통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서마저도 마비시킨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욕망에 충실하라는 문화는 결국 자연 상태의 폭력성을 통제할 기제마저 해체하고 말았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여 창조적 파괴를 수행하는 반문화운동은 사회의 소금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소금이 주식을 대체할 수는 없고 결국 다시 기존 모순을 완화한 형태로 주류 질서가 자리잡아야 한다. 양자 모두 자기 역할이 있고, 그중 어느 한쪽이 더 우세한 시기가 있을 뿐이다. 196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급증한 살인율을 1990년대 이후 대폭 낮춘 것에는 교회 공동체 등에서 기성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성 질서가 억압으로 작용하여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면 다시 새로운 창조적 파괴가 역할을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핑커의 논지에 동의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낀 부분이 있다. 핑커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이 감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지금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라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건 착각이라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착각이 바로 인류의 폭력성을 감소시켜온 원동력 아닐까. 과거보다 나아져싿고 해서 현재 존재하는 고통이 완화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증거에 기초한 합리적 추론 이전에 사람들의 도덕적 직관은 현재 존재하는 비극과 부조리에 강하게 분노하는 것이고, 이 분노와 고통에 대한 공감이 장기적인 문명화, 평화화를 추동하는 동력이 아닐까. 과거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 통계적으로는 나쁘지 않다며 현존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인간에 대한 폭력을 넘어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에 대해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혹자들은 이를 비현실적인 호들갑이라고 여기지만,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범위를 나, 가족, 부족, 계급, 성, 인종, 국적의 범위를 넘어 계속 넓혀온 역사가 바로 인간이 폭력적인 본성과 싸워온 과정이다. 어느 시대에나 타자의 고통에 대해 가장 예민한 이들, 가장 '호들갑스럽게'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길거리에서 타살당할 염려 없이 일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잠들지 않게 서로 깨워주어야 하지 않을까.


p.244~245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보적이고 자유를 희구하는 민중'의 이미지는 지식인들의 호나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자유, 가치상대주의, 다원주의 등의 서유럽적 가치는 엘리트, 중산층들의 선호이고, 서민들은 윤리적 보수주의, 종교적 원리주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독재자들은 이런 정서를 잘 자극하여 적절한 가상의 적을 던져줌으로써 대중의 맹목적 분노를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활용한다. 이런 점에서 직접민주주의가 도입되고 국민들의 정치참여가 높아지면 자동으로 자유와 평등이 진전될 것이라는 기대는 슬프게도 실제로는 배반당한 경우가 많다. 히틀러부터 우리나라의 개발독재 시대까지 독재자들은 대의제를 무력화하기 위해 직접민주주의 장치를 잘 활용해왔다. 90퍼센트 이상의 투표율과 90퍼센트 이상의 찬성율을 기반으로 한 국민투표 결과는 실상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곤 했다. 그렇다면 정권의 여론 조작만이 유죄일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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