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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언제는 안그랬겠냐만 요새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이사와 그 뒷처리 일들, 그 가운데서도 해야 할 업무, 다른 활동들을 이리저리 우여곡적을 겪으며 완료를 시켜놓고 드디어 안정을 시키나 했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수술, 그리고 더 예상하지 못한 수술 회복 기간. 그 가운데 꼬여버린 현금흐름과 일정과 신체리듬. 그리고 이런 것들을 복구시키기 위해 또 뭔가를 해야하는 상황들. 이런 불안정한 상황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그리 쉽게 나아지지 않을거란 걸 알고난 뒤의 탈진.
살면서 누가 이런걸 겪지 않겠냐만 이런 게 쌓이니 부담스럽고 업무, 생활, 다른 활동들 모두 내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쌓여있는걸 처리하고 처리하다가 지쳐서 미루고 미루다보니 마음에 안들어 마음속에 쌓아놓고 부담스러워하는 그런 고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 도중 우연히 이 영상을 봤다.
https://www.youtube.com/watch?v=DcO6mi_xURM
잘 몰랐는데 17년에 클론은 everybody라는 앨범을 발매했고 방송활동도 했었다. 그 중 판타스틱듀오라는 프로그램에서의 장면을 편집한 유튜브영상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생각하지 못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강원래가 정말 열심히 노래하는 장면, 그리고 아이가 그런 아빠를 바라보는 장면, 강원래가 구준엽에게 파트를 넘기는 장면, '초련'에서 아이가 같이 춤추는 장면. 이 장면들을 보다보니 강원래는 아직 '가수'라는 업을 버리지 않았구나. 자기 자식에게 멋진 무대를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단순히 돈 벌이 이상으로, 몇 년뒤에 내 자식이 봤을 때에도 부끄럽지 않은 뭔가가 있어야 하는구나' 라는 걸 배웠다.
그러면서 과연 내 업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태도로 임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직장인 말고, 데이터분석가 말고 직업으로서 분석가 라는 걸 어떻게 정의할까.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 것인가.
근데 이게 혼자 고민한다고 나오는 답은 아니다. 산에서 도닦으면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고 도인이 되는것처럼 말이다.
그 때 이 책을 읽었다.
김동조의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나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느낌을 이 책에서 받았다. 그냥 일반 서적 말고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뭔가 압축되고 농축된 책. 강원래의 노래를 보며 느꼈던 희열감처럼 뭔가를 불러일으키는 책. 그런 책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특히 광고주와의 회의에서 폭발해 회의를 엎어버린 후배가 잘못했다며 고개를 숙였을 때 "그래 틀렸어" 라며 저자가 위로 대신 해준 말은 깊이 와닿았다.
아마 너는 있는 힘을 다해 참고 있었겠지. 그렇게 묵묵히 듣다 듣다 어쩌면 앞의 얘기들에 비하면 별거 아닌 말에 폭발한 셈이겠지. 그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그 말을 할 때 넌 틀림없이 광고주와 하는 논의라는 점을 고려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을 거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느라고 말이야. 그렇지? 왜 네가 틀렸다고 하느냐면 말이야, 꼭 두 가지를 알려주고 싶어서 그래.
회의 내내 애써 참다가 마지막까지 참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난 그게 틀렸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했어야 했어. 최대한 앞부분에서부터 상황을 여우처럼 영리하게 통제했어야 한다는 거지. 받을 건 받아주고, 무시할 건 짐짓 지나치고 증폭시킬 만한 얘기는 좌중을 주목하게 해주고. 누가 키맨인지, 회의의 공기는 어떻게 시시각각 변해가는지, 빠르게 읽고 그에 맞는 구체적 대처를 해야 했어.
알아. 쉽지 않지. 어려운 일이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지. 사전에 만반의 준비도 필요하고 말이야. 그렇게 했어도, 물론 잘못될 수는 있지. 논리적으로 옳은 답변을 했는데 그게 오히려 회의 결과를 망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기지. 드문 일도 아니야.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그게 중요해.
성경의 전도서 3장 알지? 천하만사 다 때가 있나니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거기 보면 이런 구절도 있지. 잠잠할 때가 있으며 말해야 할 때가 있다고. 회의는 카피라이터가 말해야 할 때야. 꼭 광고주와의 회의가 아니더라도 기획팀과의 회의건 제작 임원과의 리뷰건 마찬가지야.
회의실에서 카피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나면 여러 얘기들이 나오잖아. 너도 잘 알다시피 남이 써놓은 걸 보고서 하는 말들이 꼭 예리한 지적만 있는 건 아니지. 하나 마나한 소리, 원론적인 얘기, 얼토당토않은 제안, 첫 번째 제작 회의쯤에서 이미 검토가 끝난 초보 수준의 아이디어, 그런 것들이 쏟아지곤 하지 않니? 바로 그때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답변의 책임을 진 화자라고 생각해야 해. 설명하고 설득하고 감싸주고 네 열정과 확신과 태도에 흔쾌히 압도되도록 해야 된다고. 뭘 가지고? 네가 가진 지식과 언변과 센스와 표정과 성격과 몸짓, 이 프로젝트에 대한 준비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네가 배우고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서 말이야.
네가 연애를 하는데 이성에게 과묵한 스타일이라면 그건 너의 사생활이니까 우리가 같이 논의할 문제는 아니지. 그러나 카피라이터인 네가 애써서 훌륭한 카피들을 뽑아놓고는 회의실에서 '자, 봐봐, 알겠지?' 그게 끝이라면 곤란해. 기억하렴.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건 초코파이거나 어리광일 뿐이야.
회의실에서 과묵한 건 직무유기야. 도무지 쓸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얘기를 눈치도 없이 오래 늘어놓는 통에 회의 분위기까지 망쳐버리는 그런 수다쟁이가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야.
관망하는 프로는 없어. 흘러가는 논의를 구경만 한다는 건, 백마 탄 왕자가 홀연히 나타나 네 카피를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 재투성이가 되어버린 네 카피를 구원할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훌륭한 카피를 쓴 사람, 바로 너! 오직 너뿐임을 부디 잊지 말아 주면 좋겠다. 나보다 뛰어나게 멋진 카피를 척척 써내는, 내 사랑하는 후배 카피라이터야.
나는 과연 프로였을까? 싸울 땐 싸울 줄도 알고 무시할 땐 무시할 줄 알며 받을 건 받아주는 그런 프로. 그저 주니어라는 이름으로 입닥치고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겠지 라고 한건 아니었을까.
1년차건 10년차건 프로처럼 되고 싶다면 신데렐라 신드롬을 버리라는 얘기를 들으며 열심히 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저 열심히 하려고 열심히 하는게 아니라 내 분석, 내가 하는 업무, 내가 하는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도록 하려면 그게 필요하니까. 일이 되게 만드려면 그게 필요하니까. 내 모든 걸 다해서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어떻게든 일이 되도록 만드는 그런 프로의식. 그런 프로의식을 바탕으로 어이없는 소리하는 상대방에게 'x이나 까세요'하며 상을 엎을 수 있는 그런 훈련된 자신감.
그게 갖고 싶어졌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시작하라고 독려해주는 책이었다. 내가 집중해야 할 '고객', '원칙', '전략', '프로세스'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서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힌트는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밑줄 긋기
p.12
나는 잘나갈 때의 겸손보다 일과 인생이 바닥일 때의 찌그러지지 않는 품성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p.12
누군가는 당신을 물로 보지만
우리는 당신을 보물로 봅니다.
p.14
카피라이터로서 지금의 나를 가장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사람은 시골에 있는 어머니도 아니고, 대학 때 은사님도 아니고, 지금 회사의 사장님도 아니고,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족족 박살내 버리는 클라이언트도 아니다. 목욕탕 같은 회의실에서 함께 벌거벗고 앉았던 바로 그 동료다.
p.19~20
화가 나고 울고 싶은 일들, 억울하고 얄밉고 답답하고 속상한 그런 일들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피노자의 이 경구를 떠올린다.
징징거리지 마라.
오직 이해하라.
p.21
문제 해결을 위한 제 아무리 좋은 카피도, 목적 달성을 위한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도, 결국 다 하나의 의견이다. 의견은 사실에 대한 이해보다 선행될 수 없다. 언제나 사실에 대한 이해가 먼저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잘 들어야 한다. 의견을 궁리하고 제시하는 건 그 다음의 일이다.
p.25
놀라움은 반드시 어딘가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부족한 앎을 돌아보게 만들어서 공부하게 하거나, 나는 못하고 그는 해내는 차이가 궁금해져 그에게서 어떤 태도를 배우게 한다. 그 시작에 '놀람'이 있다.
p.31
세상의 모든 '나'는 유일한 존재다. 카뮈보다, 김훈보다, 쉼보르스카나 카프카보다, 유일한 존재로서 내가 우선이다. 광고 카피는 차별화의 숙명을 필연적으로 안고 가는데, 독서란 '나'라는 유일한 필름에 감광된 카뮈와 같다. 그래서 남들이 다 아는 카뮈 가지고서는 애당초 써먹을 데가 없다. 내가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만큼 나에게 공명한 카뮈 역시 유일무이해야만 한다. 그래서 적어도 카피라이터를 위한 독서라면 남들이 다 알고 있는 카뮈가 아닌 '새로운' 카뮈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러니 무턱대고 남들이 좋다는 책을 펼쳐보기에 앞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에 더욱 시간을 쏟을 일이다.
나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산책만한 '책'이 없다. 산책은 굳이 멀리 제주 올레길이나 산티이고 순례길일 필요는 없다. 내가 사는 동네의 익숙한 골목길이면 어떻고, 차로만 다녀 오히려 눈에 닿는 풍경이 낯선 출퇴근길이면 또 어떠하랴. 만일 이 세상에 '카피의 신'이 있다면 익숙한 나의 일상 속에 있거나 아니면 아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 보면 보인다. 교교한 달빛 아래 미숙하고 욕심 많은 내가 보인다. 그리고 들린다. 못난 나를 이 세상 유일한 존재로서 응원해주는 우주의 뭉클한 박수 소리가.
p.35
가정통신문을 제출하기 전에 틀림없이 먼저 읽어보려 할 내 아이가 담임 선생님보다 몇만 배 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타깃이 아닐까?
p.37-38
나는 '광고에 정답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광고 비즈니스의 숙명 중 하나는 예측이라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는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어떤 메시지를 어떤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할지, 언제나 미래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제안이란 미래에 속하는 것이니 말이다.
마케팅 교수는 이미 승패가 검증된 프로젝트의 케이스를 과거형으로 말하지만, 현업의 카피라이터는 회의실에서 실행되기 전 아이디어를 미래형으로 말한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디어의 설계도와 청사진만 가지고서 미래의 성공을 에측한다는 건 실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실행의 논의 과정에서 '광고에 정답은 없다'는 식의 얘기가 나오는 타이밍이란 게, 꼭 비겁하게 결정의 책임을 미루거나 아이디어의 뾰족함을 뭉툭하게 후퇴시키는 경우에 일어난다.
"그 아이디어만 너무 고집부리지 말고, 여러 사람 얘기를 반영하라구, 광고에 정답이 어디 있나? 안그래?" "아이디어 A는 이래서 좋고, 아이디어 B는 저래서 좋으니까, A와 B를 합쳐보지 그래? 더 좋은 게 나올지 누가 알아? 광고에 정답은 없는 거니까 말야"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정답에 가까웠을 아이디어를 헌신짝처럼 버려둔 채 혼돈의 미궁을 떠도는 프로젝트가 허다할 것이다.
광고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커뮤니케이션의 특성상 1+1 = 2 같은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진 않더라도, 더 나은 답이나 지금 꼭 필요한 답은 반드시 있다. 아니, 어쩌면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 꼭 필요한 답이 뭔지, 더 나은 답이 뭔지, 그걸 찾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정답은 없는 거잖아'라며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회의실에서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만일 같이 일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또는 그 고아고 회사의 본부장이나 대표가 회의실에서 카피라이터의 아이디어를 실컷 들은 후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면, 이렇게 당신에게 조언하고 싶다.
"어서 도망쳐!"
p.41-42
아마 너는 있는 힘을 다해 참고 있었겠지. 그렇게 묵묵히 듣다 듣다 어쩌면 앞의 얘기들에 비하면 별거 아닌 말에 폭발한 셈이겠지. 그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그 말을 할 때 넌 틀림없이 광고주와 하는 논의라는 점을 고려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을 거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느라고 말이야. 그렇지? 왜 네가 틀렸다고 하느냐면 말이야, 꼭 두 가지를 알려주고 싶어서 그래.
회의 내내 애써 참다가 마지막까지 참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난 그게 틀렸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했어야 했어. 최대한 앞부분에서부터 상황을 여우처럼 영리하게 통제했어야 한다는 거지. 받을 건 받아주고, 무시할 건 짐짓 지나치고 증폭시킬 만한 얘기는 좌중을 주목하게 해주고. 누가 키맨인지, 회의의 공기는 어떻게 시시각각 변해가는지, 빠르게 읽고 그에 맞는 구체적 대처를 해야 했어.
알아. 쉽지 않지. 어려운 일이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지. 사전에 만반의 준비도 필요하고 말이야. 그렇게 했어도, 물론 잘못될 수는 있지. 논리적으로 옳은 답변을 했는데 그게 오히려 회의 결과를 망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기지. 드문 일도 아니야.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그게 중요해.
성경의 전도서 3장 알지? 천하만사 다 때가 있나니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거기 보면 이런 구절도 있지. 잠잠할 때가 있으며 말해야 할 때가 있다고. 회의는 카피라이터가 말해야 할 때야. 꼭 광고주와의 회의가 아니더라도 기획팀과의 회의건 제작 임원과의 리뷰건 마찬가지야.
회의실에서 카피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나면 여러 얘기들이 나오잖아. 너도 잘 알다시피 남이 써놓은 걸 보고서 하는 말들이 꼭 예리한 지적만 있는 건 아니지. 하나 마나한 소리, 원론적인 얘기, 얼토당토않은 제안, 첫 번째 제작 회의쯤에서 이미 검토가 끝난 초보 수준의 아이디어, 그런 것들이 쏟아지곤 하지 않니? 바로 그때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답변의 책임을 진 화자라고 생각해야 해. 설명하고 설득하고 감싸주고 네 열정과 확신과 태도에 흔쾌히 압도되도록 해야 된다고. 뭘 가지고? 네가 가진 지식과 언변과 센스와 표정과 성격과 몸짓, 이 프로젝트에 대한 준비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네가 배우고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서 말이야.
네가 연애를 하는데 이성에게 과묵한 스타일이라면 그건 너의 사생활이니까 우리가 같이 논의할 문제는 아니지. 그러나 카피라이터인 네가 애써서 훌륭한 카피들을 뽑아놓고는 회의실에서 '자, 봐봐, 알겠지?' 그게 끝이라면 곤란해. 기억하렴.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건 초코파이거나 어리광일 뿐이야.
회의실에서 과묵한 건 직무유기야. 도무지 쓸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얘기를 눈치도 없이 오래 늘어놓는 통에 회의 분위기까지 망쳐버리는 그런 수다쟁이가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야.
관망하는 프로는 없어. 흘러가는 논의를 구경만 한다는 건, 백마 탄 왕자가 홀연히 나타나 네 카피를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 재투성이가 되어버린 네 카피를 구원할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훌륭한 카피를 쓴 사람, 바로 너! 오직 너뿐임을 부디 잊지 말아 주면 좋겠다. 나보다 뛰어나게 멋진 카피를 척척 써내는, 내 사랑하는 후배 카피라이터야.
p.49
독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갈망이다. 무엇을 어떻게 썼길래 남의 마음을 터치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궁금해하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그런 갈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지 않으려야 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53
인생은 길다. 커리어도 길게 봐야 한다. 광고는 지적인 비즈니스인 동시에 육체적으로 고달픈 노가다다. 한두 번 장사할 게 아니라면 정신도 육체도 평상의 컨디션을 가능한 한 베스트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평상의 루틴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으면 비상 상황에서의 대처도 남들보다 대범해질 수 있다. 동료의 시니컬한 아이디어 비평에 대해서도 웃으며 설득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최선을 다한 일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씩씩하게 다음을 도모하여 여유를 갖는 것이 가능해진다. 말하자면, 다운은 허용해도 케이오는 당하지 않기 위해 일상의 루틴을 건강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61
내가 쏜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지 못했는데, 바람을 탓한들 무슨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p.67
첫째, 데드라인을 자발적으로 당기라는 것. 마치 손목시계를 5분 빠르게 세팅해두는 것처럼 중요 시점을 하루씩 당겨놓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이 내일이라면 오늘은 허둥지둥 밤을 새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준비를 다 끝내놓고 프레젠터의 컨디션을 점검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둘째, 데드라인을 잘게 썰라는 것. 클라이언트에게 제시하는 일정이 15일 후이고 사내 리뷰가 10일 후라면 이틀은 정보와 팩트를 읽고 확인하는 일정, 다음 이틀은 우선순위가 더 높은 기존의 일에 집중하면서 예열하는 일정, 그 다음 날은 몰입해서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일정으로 잡아두면 된다.
p.72
클라이언트의 과제를 놓고 광고 회사 간 치열한 승부를 벌이는 프레젠테이션만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다. 나의 의견이나 주장에 매력을 느끼게 만들고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결국 설득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이런 관점으로 보면, 세상만사가 프레젠테이션 아닌 게 없다. 동료 크리에이터들에게 내 카피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일도 말할 것 없이 프레젠테이션이며, 회식이나 식사자리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는 짧은 시간 안에서도 본인의 능력을 어필하거나 팀에 필요한 자원을 받아내도록 회사 임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프레젠테이션이다.
p.73-74
실전 프레젠테이션에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몇 가지를 공유해보겠다.
1. 말의 순서만 달라도 감흥이 달라진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동삭을 받으며 봉준호는 말했다. "어렸을 때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다. 영화 공부를 할 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고 책에서 읽었다. 그 말은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었다." 만약 똑같은 얘기를 "마틴 스콜세지가 책에 이렇게 썼었다"로 시작했다면 그렇게 시상식장을 전율케 할 수 있었을까? 네버!
2. 확신은 말끝에 있다. 우리말에 성조나 억양은 없지만 강세를 말끝에 준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용두사미를 경계할 것. 말의 앞부분은 기세 좋게 시작했다가 말의 끝은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3. 불필요한 말은 말 그대로 불필요하다. 말과 말 사이에 "그..."라든지 "어... 그니까.."같은 말이다.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충분할 것을 굳이 "해보도록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는 식으로도 말하지 말자. 솔직히 좀 바보 같다.
4. 스크린을 보지 말고 청중의 눈을 봐라.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스크린을 보는 것보다 더 최악은 다음 할 말이 뭔지 보려고 스크린을 보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은 머릿속에 거의 들어있어야 한다. 들어있지 않다면 둘 중 하나다. 얘기의 흐름이 엉망이거나, 프레젠터로서의 준비가 소홀했거나.
5. 리허설을 실전처럼 하라. 연습이 해가 될 리는 없으며,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했으나 현장에 가지 못하는 동료와 후배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6. 듣는 입장에서 할 말을 정리해보라. 파워포인트 문서를 스크린으로 보면서 프레젠터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프레젠터가 텍스트를 그대로 줄줄 읽기만 한다면, 듣는 입장에선 무척 지루할 수밖에 없다. "저희 결론은 이 한마디입니다"라고 말하고, 정작 결론은 스크린의 문장을 눈으로 잠시 읽게 하자. 몰입도가 높아지는 좌중의 분위기가 느껴질 것이다.
7. 두 다리로 똑바로 서라. 건들건들 움직이는 게 능숙해 보이는 줄 안다면 착각이다.
8. 나는 전달자이고 전달하려는 내용을 저들은 모른다는 걸 명심하라. 내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는 아무도 관심 없다. 프레젠테이션은 모델 오디션도 아니고 스피치 경연대회도 아니다. 우리가 준비한 걸 내가 전달만 하는거니까. 생각해보면 긴장해서 떨 이유란 게 전혀 없다.
9. 위에 열거한 것들 다 소용없다. 프레젠테이션할 내용이 별로라면. 프레젠테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첫째도 콘텐츠, 둘째도 콘텐츠, 셋째도 콘텐츠다.
p.78
헌혈 회의를 할 땐 헌혈 폴더를 열고, 신라면 회의를 할 땐 신라면 폴더를 연다. 필요할 때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일하지 않을 때 일하는 척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풍요로운 인풋의 폴더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행의 폴더일 수도 있고 독서의 폴더, 축구나 볼링, 음악의 폴더일 수도 있겠다. 나에게는 반신욕의 폴더, 함께 사는 네 마리의 고양이의 폴더도 있다.
p.88
삶은 언제나 글에 우선한다. 쓴다는 것 이전에 삶이 있다.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부정적인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감동적인 에세이의 필자가 되기도 한다.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또 자기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느냐의 문제는,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일 뿐만 아니라 내 동료들과 어떻게 일을 도모해 가느냐와도 반드시 연결된다. 켈리와 앤디 역시, 일에서도 그리고 삶에서도 겸손한 열정과 집요한 긍정의 소유자일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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