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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영미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1)

by Diligejy 2015. 11. 21.

p.7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는 꿈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만나게 될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지 못할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고통스러운 갈망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논리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의 징표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p.11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클로이를 만난 직후, 그녀를 필생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p.17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적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구원의 연인을 만나는 일이 객관적으로는 우연이고 따라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두루마리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인생에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의미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두루마리 같은 것은 없으며[따라서 우리를 기다리는 미리 정해진 숙명은 없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 -  간단히 말해서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p.18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우리의 사랑 이야기의 발단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증명해준다 -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p.19~20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 된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된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p.23~24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ㅇ느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p.26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시간[이 또한 그 나름으로 거짓말을 하지만]이 아니라면 누가 그 답을 말해줄 수 있을까?

 

p.27

확실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구애라는 땅에 들어가 얼쩡거리지 말아야 한다. 그 땅에서는 모든 웃음과 모든 언어가 만이천 가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열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정상적인 생활에서는 [그러니까 사랑 없는 생활에서는] 액면 가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들이 이제 어떤 사전으로도 다 풀어낼 수 없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구애를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의심들이 한 가지 중심적인 질문으로 환원되고, 구애자는 판결을 기다리는 범죄자처럼 떨면서 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나를 바라는 것일까, 바라지 않는 것일까?

 

p.33

욕망 때문에 나는 실마리들을 악착같이 쫓는 사냥꾼이 되었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비록 구애의 의식(儀式)들 때문에 안달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런 수수께끼 때문에 클로이가 독특한 매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우리는 곧 그 사람을 잊어버린다]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p.35

그녀가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내가 그녀의 냉소주의를 쫓아낼 남자일까? 우리는 지금 우리 탁자 위에 놓인 문제가 사랑 그 자체의 본질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이냐[그리고 무엇이 될 것이냐]라는 것을 무시한 채 사랑에 관하여 추상적으로 이야기했다.

 

p.41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p.55~56

침실의 철학자는 나이트클럽의 철학자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존재이다. 그 두 영역에서는 육체가 두드러지고 또 그만큼 상처받기도 쉽기 때문에, 정신은 말없이, 개입 없이 판단을 내리는 도구가 된다. 생각이 배신행위가 되는 것은 그거이 프라이버시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연인은 말한다. "나한테 하지 못할 말이 있다면, 당신 혼자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당신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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