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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환한 숨

by Diligejy 2021. 12. 27.

p.96

그녀의 말은 모두가 공평하게 비정하다면 한 사람의 비정은 모두의 비정으로 희석된다고, 세상 어디에도 더 비정한 비정은 없다고, 그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p.97~98

"얼마 전에 무슨 시민 단체에서 일한다는 분이 병원에 찾아와서 그러데요. 이 사회가 하나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요. 그런가요, 선생님?"

"......"

"근데요, 그거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내가 못나서 하나가 저렇게 된 거예요. 고등학교 중퇴에 미혼모에, 나 좀 못난거 맞잖아요."

"하나 어머님, 약한 생각은 하지 마시고....."

"약한 게 아니고요, 내 현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나 솔직히 하나가 인문계 대신 취업 잘 되는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 고마웠어요. 미안한 건 잠깐이고 오래오래 고맙더라고요. 하긴, 선생님 같은 분은 그때 제가 느낀 고마움을 이해 못 할지도 모르겠네요. 선생님한테 잘못이 있다는 게 아니라요, 그것도 현실이니까요."

 

왜였을까. 그 순간, 오랫동안 물속에서 거친 숨을 참고 있다가 그제야 물 위로 떠오른 듯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불가해할 만큼 맑아져서 당혹감마저 밀려왔다. 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건, 그때껏 그녀가 내 처지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해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근데요 어머님, 혹시 제가 기간제 교사인 건 아세요?"

".......네?"

"그러니까, 저는 비정규직 교사라고요. 2주 뒤면 저는 하나의 담임교사가 아니에요. 선생도 아니고요."

 

p.147~148

"너도 와서 마셔."

그는 몇 번에 걸쳐 내게 권유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저어 보일 뿐,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와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이 전세 아파트와 학원을 정리한 돈으로 빚을 갚자고, 모든 것이 지겹다고, 그 이후엔 실업급여와 아동수당으로 연명해야 할 거라고 고백할까봐 나는 겁이 났다. 우리의 계급이 추락했고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가가 아니라는 서고가 그 고백에 이어질지도 몰랐다. 불안이 실체가 되지 않도록 그의 고백을 차단하여 침묵의 공유지를 유지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할 수 있는 것도 그뿐이었다. 고개가 점점 더 옆으로 기울고 어깨의 선이 안으로 말려가는 그를 두 눈을 끔벅이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는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뒤엔 붙박이장을 뒤져 카메라를 꺼냈다. 다큐멘터리를 본 뒤로 카메라를 꺼내보는 횟수는 확연히 잦아져 있었다. 카메라는 여전히 묵직했고 특별히 고장 난 데도 없었지만 5년 사이 구식이 되어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작업을 하게 된다면 나는 이 구식 카메라로 촬영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내게 지원금을 대줄 곳은 없었고, 하나의 작품을 오나성하려면 카메라 외에도 돈 쓸 곳은 많다. 촬영 장비를 빌려야 하고 그 장비를 사용할 줄 아는 스태프를 구해야 하며 그들에게 인건비와 식사비를 정산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액수의 총합은 현재 내게는 불가능한 숫자였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았다. 

 

p.180

증언은 객관적일 수 없다. 증언은 증언자의 기억 속에서 선택된 언어이고 증언자는 역사의 현장에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구경꾼의 위치에 있으려 할 뿐, 자신의 과오나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의식하지 못하며 때로는 완전히 망각하기도 한다. 철원과 진주와 함양과 여수 등에서 만난 역사의 증언자들에게서 내가 본 것은 혼란이었다.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해선 안 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아니 어느 부분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

 

p.216

내밀하고 사적인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개 그런 식으로 말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좁혀 선택된 사실만을 말했다. 거짓은 미안하고 수다는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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