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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성에

by Diligejy 2022. 5. 23.

p.15

친구는 그 선배와 공유했던 추억들, 그들 사이에 오갔던 은밀한 시선과 사랑의 기호들, 터무니없이 큰 의미를 부여한 사소한 기억들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부풀려진 흔적이 역력했고, 실재했던 이야기라기보다는 친구의 내면에서 희구해온 환상에 가까워 보였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친구의 애통함은 선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환상을 잃는다는 상실감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어차피 환상 속 사랑이라면 그 대상의 실체나 생존 여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려다가 연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환상에 대해 생각할 때 진심으로 궁금한 사항이었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순간 치명적인 폭력이 될 것 같았다.

 

p.18

그것을 '알아본다'라고 표현한다는 사실을 연희는 나중에 알았다. 많은 사람들 무리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는 한 사람, 처음 만났어도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십이 년 전 세중을 처음 보았을 때 연희도 그랬다. 엘리베이터 옆 자동판매기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돌려 긴 복도를 살피더니 곧바로 연희에게 다가와 현실문화 연구소가 어느 쪽에 있는지를 물었다. 바로 그때 연희는 그를 알아보았다. 아, 이 사람이구나. 생물학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상대방과 사랑에 빠질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는 십오 초 내지 이 분쯤 걸린다고 한다. 연희가 오른쪽을 손짓하게 세중이 작게 목례했을 때, 연희는 세중도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확신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내밀한 기운이나 파장 같은 것을 연희는 틀림없이 감지했다. 십오 초나 이십 초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p.21

노안이라는 건 말이야, 그 나이가 되면 작고 사소한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멀리, 큰 틀에서 세상을 봐야 한다는 경고 같았어.

 

p.36

그동안 내가 깨달은 사실은 네 말이 옳았다는 거야. 다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왜 환상이 현실보다 힘이 세어 보이는지, 어떤 종류의 꿈은 한 사람의 생을 온통 지배하는지, 때로는 몽상이 신념처럼 보이는지.... 그런 것들이었어.

 

p.37

물론 이제는 알고 있다.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절망같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언어는 순간의 상태를 지칭한다는 것, 사랑의 언어 역시 그 말을 뱉는 순간에만 진실하다는 것.

 

p.47

사랑도 일종의 기상이변이나 비상사태 같은 거라 생각해. 사람들은 가끔 평화로운 사랑, 안온한 사랑에 대해 말하는데, 그때마다 그 말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을 일깨워주고 싶어져. 내가 생각하기에 사랑은 익사이팅한 도전이고, 지속되는 감정의 격동이거든. 평화나 안온은 사랑을 수식하는 용어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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