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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바닥에서 벌어지는 가면놀이 - 관리자들

by Diligejy 2022. 6. 12.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마치 옷을 입지 않고 집 밖을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가면을 쓴 채 문 밖을 나간다. 

그리고 누구나 그 가면속에 어느정도 자신의 책임을 떠넘기며, 자신이 선하고 좋은사람이라는 믿음을 보호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저자는 문제를 낸다. 안전 규칙을 지키지 않고 그저 완료 일정만 당기라는 압박에 노가다꾼 한 명이 죽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늘 그래왔듯이 가면에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을 보호할 것인지 아니면 무섭더라도 가면을 벗어볼 거냐고.

 

사실 옳은 대답은 이미 정해진 질문이다.

답을 몰라서 대답하지 못할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걸 20살이 넘었다면 누구나 알 거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대답이 어려운 게 아니라 대답을 감당할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질문이니까. 

 

모두가 가면을 쓰고 노는 잔혹하고 냉혹한 가면놀이 속에서 음악을 끄고 가면을 벗어던진채 자신이 상처입는다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건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하는 게임일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소설은 아쉬웠다. 선/악 구도가 너무나도 명확하고, 마지막에 권선징악인 것처럼 그려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 속 가면놀이는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는 2차원의 게임이 아니다. 3차원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인데 어떻게 그렇게 명확하게 선/악구도가 나눠지고 마지막에 다들 각성해서 권선징악을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온갖 것들이 얽히고 설켜 아무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어둠의 가면놀이를 그려내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단어 하나하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을 흔적들이 보였다. 그저 자신의 노력덕분에 성공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추천한다.

 

밑줄긋기

 

p.27

아내나 자신이나 서로 절박했지만 절박하기만 했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절박해지고 감정을 드러낼수록 그럴 여지도 여유도 없어졌다. 선길은 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않냐며 날을 세웠고 아내는 왜 자신의 절박함을 이해하려 하지 않냐며 날을 세웠다. 이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한것이었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시 언쟁이 시작되면 상황은 똑같아졌다. 절박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천천히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그렇게 외따로 고립되어 가는 것. 이렇게 떨어져 지내게 되고서야 그것이 보였다.

 

p.45~46

"인마, 해 줄 거 다 해 주고 챙겨 줄 거 다 챙겨 주는 게, 그게 관리야? 그게 시중드는 거지, 관리야? 해 줄 거 다 해 주고 챙겨 줄 거 다 챙겨 줘야 일하겠다는 놈은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놈이야. 관리는 그런 놈들부터 제일 먼저 솎아 내는 게 관리고. 걔네들은 관리가 안 되니까! 황 반장도 그런 놈이니까 내 진즉 솎아 낸 거야. 알겠어? 그런 놈들은 해 주고 챙겨줄수록 지가 상전인 줄 안다고. 아쉬운 게 있어야, 뭐 하나 빠지고 부족한 데가 있어야, 그걸 내가 쥐고 흔들 수 있어야 관리가 되는 거야."

 

p.46~47

"봐라, 너부터 당장 그러고 있잖냐.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돠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p.94~95

역시나 관리자에게 필요한 것은 갈라 세우고 갈라 세우고 오로지 어떻게든 갈라 세우는 일이었다. 줄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저희끼리 알아서 치고받도록, 그러느라 뭐가 중요하고 누가 이득을 보는지 생각도 못 하도록. 인간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지기 싫어한다. 그 속성마저 남들만 그렇고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그래서 싸우고, 그렇게 싸우기 때문에 싸울수록 더 편향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 불신을 극복하지도, 서로 이기거나 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진흙탕 밑바닥까지 서로 끌고 들어가기만 한다. 그러다 결국 자신들을 끄집어 올려 줄 관리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싸움은 끝나야 하고 누군가는 개처럼 물불 못 가리게 된, 자신들이 아니라 저것들을 따로 가둬야 하니까.

 

p.106-107

개죽음 중의 개죽음이었다. 흙막이 공사를 하지 않아 사면이 그대로 빗물받이까지 이어져 있었고 안전수칙이나 시공 기준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사고가 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간 몸이 둔해진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기분 탓에 체감하지 못했을 뿐 이미 무리한 일정인데다 모두 뒤로 물러설 때 항상 앞으로 나서 온 선길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전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두 그렇게 쓰거나 아예 안 쓰기도 했고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똑바로 썼더라도 작업 상태 때문에 큰 도움이 됐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선길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선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 선길이 어제가 아니면 오늘은, 오늘이 아니면 내일은 내려올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 멧돼지가 결국 내려온 셈이었다. 산이 아니라 소장의 머리에서 나온 그 횡액이 기어이 선길을 덮쳤다.

 

p.124

사람들은 자신들을 속였다. 자신들이야말로 선하다고, 약자와 피해자의 편에 서 있고 그것을 아름답고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공정한 판관의 역할에, 도덕적 우월감에 심취해 갔다. 정작 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그저 자기 자신들을 중심에 놓기만 하면서.

 

p.125

소장은 도청 담당자의 말을 떠올렸다. 인생이야말로 연약한 거라니, 참 고상하고 그럴싸한 말이었다. 그렇지, 인생이야말로 연약하고 위로받고 서로 부둥켜안아 줘야 하는 것이지. 산 사람은 계속 살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니까. 산다는 건 비용이 들고 계속 비용이 들어가야 한다는 거니까. 인생이란 단지 비용의 문제였다. 전기비, 수도비부터 세금, 교육비, 생활비까지 온갖 비용이 들어갔고 더 많은 비용이 들수록 더 가치 있고 한번 살아볼 만한 인생처럼 보이니까. 그러니 모두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이 청구하는 비용에,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한다는 노예운반선에.

 

p.155

사람들은 착하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말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선의나 공감에 대해 그러듯. 그건 별게 아니었다. 왜 부모 말, 선배 말, 상사 말 잘 듣는가? 소용이 있으니까, 그러면 뭐라도 하나 생기니까. 착하다는 건 화폐였다. 당장이든 나중이든 돌아올 뭔가를 위해 지불하는. 사람들 역시 정말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부자 대우 받으면 좋아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p.157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모든 믿음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세상에서 제일 참혹한 일을 벌였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 바로 자신은 착하고 항상 착하다는 믿음이었다. 그 살마들은 양민을 칼로 총으로 베고 쏴 죽이면서도 생각했다.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오로지 선행을 베푸는 것뿐이라고.

 

p.168

각자가 각자 져야 할 짐을 지는 것뿐이다. 진실이란 오직 그렇게 스스로 짊어지는 것으로만 지탱될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몸만큼, 각자의 몫만큼. 책임감, 도덕, 그 밖에 소장이 이야기한 모든 번드르르한 것들이 마찬가지다. 자신의 몫부터 하고 난 다음에, 감당해야 할 것들을 스스로 감당한 다음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소장부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선길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현경은 다시 가책과 통증을, 불안과 회의를 느꼈다. 떠넘긴 것이 아닐까, 여자에게 괜한 고통을 준 것이 아닐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괴로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러나 감당해야 할 것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모든 선을 스스로 지워 버리는 셈이었다. 죽음이라는 진실도, 또 그것이 있기 때문에 진실일 수밖에 없는 살아 있음도. 모두 희미해져 시간과 상황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령처럼, 유령들처럼.

 

p.171

"너 왜 사람이 안 변하는지 아니?" 소장은 한 대리를 느긋하게 바라봤다. "사는 덴 '그런데'가 없어서야. '그랬으니까' 그것만 있거든, 사는 덴. 세상엔 공짜가 없어. 비용을 꼬라박고 때려 박아야 가까스로 살아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손절을 칠 수가 없는 거야. 안 그러면 지금까지 처박은 게 말짱 황이 되니까. 사람이란 그걸 참 무서워한단다. 말짱 황이 되는 거, 죄다 도루묵이 되는 거." 소장은 피식 웃었다. "뭔가를 하면 계속 더 그렇게 해야 돼. 이미 했으니까, 이미 했는데가 아니라. 그게 계속된다는 거고 그렇게 계속되는 게 인생이야. 안 그렇습니까, 유 반장님?"

 

p.176

"감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래야 하고, 늘 그다음은 있고 그래야 그다음에 오는 것도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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