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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이 책은 미국의 쇠락에 관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모든 나라들의 부상'에 관한 책이다.
p.26
이 새로운 시대와 관련된 하나의 양상이 있다. 힘과 권력이 국가에서 다른 주역(actor)으로 분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부상하고 있는 '나머지'는 많은 비국가적 주역들을 포함하고 있다. 집단들과 개인들이 힘을 얻고 있는 반면, 위계질서 중앙집중화 그리고 통제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한 때 각국 정부가 통제했던 기능들을 이제는 세계무역기구나 유럽연합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공유하고 있다. 어느 나라이든, 어떤 이슈에 관해서든, 비정부 단체들은 매일같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기업체도 자본도 비즈니스에 최적인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어떤 정부들에게는 당근을 주고 다른 정부들은 회초리로 내리치기도 한다.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스트들, 마약 밀수 카르텔들, 반란군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무장세력들은 이제 이런 국제 체제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활동할 공간을 찾고 있다. 힘은 민족국가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사방팔방으로 분산되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양 날개로 하는 국가적 힘이라는 전통적인 장치들은 점점 그 효율성을 잃어가고 있다.
p.27
정치적 군사적 수준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도 슈퍼 파워가 단 하나인 세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 산업적, 금융적 교육적 사회적 문화적 - 차원에서는 힘의 분배가 움직이고 있으며, 미국의 우월에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우리가 반미국적인 세계(Anti-American World)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포스트 아메리칸 월드(Post-American World)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이 세계는 수많은 다른 장소로부터 수많은 다른 민족들에 의해 규정되고 이끌려가는 세계다.
p.30~31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20년 동안, 우리는 하나의 패러독스를 살아왔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아침 신문을 읽을 때마다 경험하는 패러독스다. 폭격이다, 테러 계획이다. 불량 국가다, 내분이다... 매일같이 이런 보도가 빠진 날이 없는 가운데, 세계 정치는 그야말로 심각한 문제투성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글로벌 경제는 여전히 전진하고 있으며, 그 전진을 방해하는 장애며 위기들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반적으로는 활기찬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시장이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건 경제 뉴스 때문이지 정치 뉴스 때문은 아니다. 신문의 첫 페이지는 도무지 비즈니스 섹션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p.34~35
나는 전쟁이 낡아빠진 옛일이라고 믿는 따위,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 계속될 것이고 국제정치의 본질도 계속 그럴 것이다. 예외적으로 피로 얼룩진 시대가 지나고나면, 역사는 안저으이 시대를 목격했었다. 그리고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사악함을 재는 유일한 척도는 아니다. 1990년대 초 구 유고연방에서 있었던-미리 계획되었고 종교적 차이에서 발단된 체계적인 - 학살은 20만명의 사상자를 냈었는데, 이는 그 어떤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지극히 참혹한 도덕적 만행이었다. 알카에다의 야만적 행위는 - 냉혈인간이나 저지를 법한 참수형, 일부러 무고한 사람들을 목표로 삼은 것으로 - 그 희생자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지라도 흉악스러운 행위이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것을 정확히 기술해야만 한다. 그리고 현재 이 시점에서는 우리들의 이 시대가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볼 때 유달리 평온하다고 묘사해야 하겠다.
p.37~38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점점 감소해 온 이라크에서는, 일련의 복잡한 속내가 폭로되면서 알카에다의 입지는 계속 약화되어 왔다. 애당초 알카에다가 내놓은 파트와(fatwa) 및 다른 성명들을 보면, 단지 '십자군'이나 '유태인'들을 비난했을 뿐, 시아파(Shiites)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라크가 이 모든 상황을 변화시켰다. 수니파(Sunni)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던 알카에다는, 반시아파 그룹으로 탈바꿈하면서 수니파의 순수주의적 세계관을 신봉하게 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알카에다 우두머리로서 지금은 고인이 된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는 와하비(Wahhabi) 스타일의 순수주의로부터 파생된 시아파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지녔다. 2004년 2월 오사마 빈 라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아파로부터의 위험은 (...) 미국인들로부터의 위험보다 더 크다. (...) 유일한 해결책은 시아파들이 수니파에게 굴복할 때까지 시아파의 종교적 군사적 그리고 다른 근간 조직들에 계속해서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p.48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시기는 가끔 조용한 시대로 기억되지만, 사실은 긴장으로 가득 찬 시대였다. 냉전의 초반기로, 소련 및 중국과의 갈등에 대한 공포로,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규정되는 시기이다. 또한 대만해협, 콩고, 수에즈, 피그 베이, 베트남 등에서 시도 때도 없는 위기가 종종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산업 경제는 강력하게 순항하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자금이 유럽과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갔던 자본 이동의 두 번째 위대한 시기였다. 그 결과, 서유럽은 2차 대전의 잿더미에서 본래 모습을 회복했고, 최초로 비서방 국가로서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이 그 후 23년 동안 연 평균 9퍼센트 이상 성장할 수 있었다.
p.51
지난 몇 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이 모두 하필이면 인구가 적은 나라들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우연이다. 미국은 규모 면에서 그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장 큰 나라이며, 미국이 지배적인 플레이어가 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의 그런 우월은 진짜로 큰 나라들이 가난의 수렁에 빠져 있어서 그들을 발전시켰을 정책들을 채택할 수 없었거나 그럴 생각조차 없었던 세계에서나 가능한 얘기였다. 이제는 그런 거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 자연스럽게 이들 국가의 규모로 말미암아 미래의 세계지도에 커다란 발자국을 찍을 것이다. 서구의 기준으로 보면 이 나라 일반 국민은 여전히 가난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전체 국부는 엄청날 것이다. 혹은 이걸 수학적으로 이야기해볼까. 아무리 적은 숫자라도 그걸 25억으로 곱한다면 매우 큰 수가 된다. (25억은 중국과 인도의 인구를 합친 숫자다) 글로벌 권력이동이 거대할 것이며 장기적일 것이란 보장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요소 - 출발이 낮았다는 점과 인구가 많다는 점 - 때문이다.
p.52~53
그러나 모든 것을 뒤흔든 지각변동은 1980년대 후반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이었다. 소비에트식 중앙 계획경제가 완전히 신용을 잃고 정치 스펙트럼의 한쪽 끝이 폐허로 변하자, 전체 논쟁의 축은 크게 바뀌었다. 한 나라 경제의 틀을 짜기 위한 기본적 접근법에는 갑자기 딱 하나만이 남게 된 것이다.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을 우리 시대의 향후 진로를 결정한 경제적 사건으로 묘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때 이후로 여러 다양한 자유화와 시장화 계획에 대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영국 경제를 다시 살리기 시작했던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가 했던 유명한 말처럼, "이제 대안은 전혀 없다"
p.63~64
풍요가 불러온 문제 중에서 가장 격심한 것은 천연자원과 환경에 대한 글로벌 성장의 영향이다. 우리의 지구에서 맑은 공기, 사용할 수 있는 수자원, 농업 생산물, 그리고 없어선 안 될 여러 가지 원자재 등이 고갈되고 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문제들 중 몇 가지는 - 효율성을 높이고 새로운 공급원을 창출함으로써 - 해결할 수 있으나, 그 해결의 속도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느렸다. 예를 들면 농업 생산성은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2025년이면 80억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지구 전체의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오늘날 헥타르 당 3톤의 수확량을 4톤으로 높여야만 한다. 이와 비슷하게 수자원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우리의 능력 또한 그것을 소비하는 속도만큼 빠르게 신장하고 있지 않다. 20세기 중 세계 인구는 3배가 늘어난 반면, 물 소비는 6배나 늘어났다. 미국인들은 마시고 요리하고 목욕하는 데 하루 400리터 이상의 물을 사용한다. 이에 비해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40리터만 쓸 수 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점차 부유해질수록, 물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여 더 큰 압박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물을 둘러싼 폭력적인 충돌이 이미 터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인간들은 물을 찾아 이동해왔다. 만약 미래에 물의 원천이 고갈된다면, 수 백 만의 사람들이 주거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67~68
경제적인 부가 증가하면 민족주의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법. 이것은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여러 세기 동안 가난하고 불안정한 나라에서 살았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그런 다음 상황이 호전되어 당신의 나라가 떠오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당신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온 세계가 쳐다봐주기를 열망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인정과 존중의 열망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계화와 경제적 현대화가 정치적 민족주의를 키우고 있다는 것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민족주의를 후진적인 이데올로기이며 진보의 발걸음이 계속됨에 따라 틀림없이 사라질 것으로 볼 때만 그렇다.
민족주의에 대해서 미국인들은 항상 고개를 갸우뚱한다. 미국이 해외에서 다른 나라 일에 개입할 때, 미국은 자신들이 진심으로 그 나라가 더 잘 되도록 돕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믿는다. 필리핀과 아이티에서 베트남과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노력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응은 미국인들을 항상 놀라게 했다. 미국인들이 자기 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 우리는 그것을 애국심이라고 부른다 - 가지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면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과 소유욕을 보이면 진짜로 깜짝 놀란다.
p.69-70
서구 세계 밖에 있는 많은 나라들에서는 세계사에 대한 완전한 서구식 혹은 미국식 이야기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좌절감이 한껏 부풀어 있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는 자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배역이나 기껏해야 단역밖에 맡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러시아인들은 영국과 미국이 파시스트 독일과 일본의 군대를 영웅적으로 패배시켰다고 떠들어대는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통상적인 이야기에 대해 오래 전부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스티븐 앰브로즈로부터 켄 번즈에 이르기까지 미국식 역사서술의 주류를 감안할 때, 히틀러와 도조에 대항한 결정적인 전투에서 러시아의 역할은 미미했다고 미국인들이 믿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리라. 사실은 독일과 러시아가 싸운 동부 전선이야말로 2차 대전의 핵심 전쟁터였다. 동부 전선에서는 제2차 대전의 다른 모든 전투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지상전이 있었으며, 3천만 명이 희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 전체 병력의 3/4이 싸운 곳이고 독일 전사자의 70퍼센트가 발생했던 곳이다. 유럽 전선의 싸움은 여러 측면에서 부수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는 그것이 메인 이벤트인 양 다루어진다. 작가 벤저민 슈워츠가 지적했던 것처럼, "스티븐 엠브로즈는 6만 명의 독일군을 몰아낸 미-영 연합군의 시칠리아 합동 공격에 [관심을] 쏟은 나머지, 1,500만 명의 소련군과 독일군이 전투를 벌였고 앞의 시칠리아 전투와 정확히 같은 시기에 발생했던 역사상 가장 큰 전투인 쿠르스크 전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 설사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나치 독일에 대항한 전쟁은 (...) 위대한 전쟁사가 존 에릭슨이 주장헀듯이, 기본적으로 '스탈린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p.72-73
1991년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국무부 장관은, 세계 각국이 미국을 거쳐서 각자의 목표로 가는 소위 "대도시 터미널 집중방식(hub-and-spoke)" 과 같은 것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비행 패턴이 매일 새로이 그려지는 "점대점 연결 루트(point-to-point routes)"와 같다고 묘사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물리적 의미에서도 진실이다. 최근 10년 동안 중국을 방문한 러시아 여행자수는 1995년의 48만 9천명에서 2005년에는 220만 명으로 4배 증가했다.) 포커스는 이미 움직였다. 이 나라들은 점점 더 그들 자신에 - 그들이 떠오르게 된 스토리에 - 대해 관심이 커지고, 서구와 미국에 대해서는 갈수록 관심을 잃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2007년 내내 대통령 선거전에서 반미주의를 완화해야 한다는 토론을 벌인 것은 다분히 초점에 빗나간 것이다. 세계는 분노에서 무관심으로, "안티 아메리카니즘에서 포스트 아메리카니즘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p.76-77
권력이 다양해지고 분산됨에 따라, 정당성(legitimacy)은 한층 더 중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정당성이야말로 세계무대에서는 공통점이 없는 모든 주역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무리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정당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면, 그 어떤 해결책도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해결책이 어느 한 나라의 파워와 선호에 입각한 산물이라고 간주된다면,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르푸르의 대학살은 잔인한 일이며, 그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하더라도, 그런 개입은 수단의 주변국들뿐만 아니라 주요 강대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질 경우에만 성공할 수 있다. 만약 미국이 독자적으로 또는 몇몇 동맹국들만 끼고서 행동한다면 - 5년 동안에 세 번씩이나 무슬림 국가를 침범한다면 - 그 시도는 거의 확실히 미국의 뒤통수를 칠 것이고, 수단 정부로 하여금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거센 슬로건을 내걸도록 할 것이다.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 기록은 실제로 정당성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완벽한 본보기다. 그렇지만 부시의 실패 이상으로 딜레마는 여전히 남는다.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나라들의 동참이 필요하다면, 이제 플레이어가 더 많은 - 그것도 막강한 플레이어까지 포함된 - 세계에서 과연 어떻게 그걸 성취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짜 딜레마이다.
p.84
미국이 불량한 행동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 대항하는 하나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동맹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워싱턴이 새로운 질서 내에서 다른 국가들도 이해당사자가 되는 것을 허용할 용의가 있음을 보일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의 국제 질서에서 진보는 타협을 의미한다. 그 어떤 나라도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이건 말이나 글로 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시행하는 것은 힘든 노릇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들의 힘과 영향력의 증가도 받아들이고, 이해관계가 두드러지더라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 포용과 억제 사이의 - 균형은 다음 몇 십년간 미국 대외정책이 해결할 중요한 과제다.
p.90
지금으로부터 여러 세대가 지난 후, 역사가들이 현재에 대해 기록할 때,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적을지 모르겠다.
"21세기의 최초 몇 십년간 미국은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즉, 지구촌을 세계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 정작 미국 자신은 스스로를 세계화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p.93-94
그러나 정화의 이야기는 참으로 기이하게 끝나고 만다. 143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황제가 권좌에 올랐다. 그는 갑자기 제국의 항해 탐험을 중단시키고 무역과 탐험 정책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몇몇 관료들이 이 전통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1500년에 황실은 (원근을 막론하고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2개 이상의 마스트를 장착한 배를 건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반포했다. 1525년에는 대양을 항해용 선박을 보면 무조건 즉각 파괴하고 그 선주를 투옥하라는 명령이 해안을 관리하는 당국에 하달되었다. 그리고 1551년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하나 이상의 돛을 달고 바다로 나가는 것은 범죄행위가 되었다. 1644년 청 왕조가 들어섰을 때, 이 기본 정책은 계속 지켜졌으나, 조정은 법령의 포고만으로는 맘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청 왕조는 700마일에 이르는 중국의 남해안 일대를 초토화시켜 아예 그 곳에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황실이 원했던 대로, 중국의 조선업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화의 마지막 항해가 끝난 후 몇 십 년 사이에 수십 명의 서양 탐험가들이 인도와 중국 연안까지 항해해 왔다. 그러나 중국의 배가 유럽을 향한 항해에 오르기까지는 그로부터 300년이 지났으니,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 방문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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