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외교/국제정세론

기드온의 스파이 1

by Diligejy 2025. 3. 16.

 

 

p.20

프랑스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모리스가 파리에 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이유는 몰랐다. 공작을 진행할 때 주재국 대사가 모르도록 하는 것은 전형적인 절차였다. 만일 일이 잘못될 경우 대사는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하기 땜누이었다.

 

p.56

벤구리온과 이츠하크 라빈도 이 모임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영혼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누구도 송환될 유대인의 수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 송환이 아랍인과의 재대결을 촉발시킬 것이라는 점은 모두 알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유대인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영국은 2차 대전이 히틀러의 패배로 끝난 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오는 것을 용인치 않을 것이라고 강경하게 공언하고 있었다. 지역 인구 비율에 불균형이 초래될 것이라는 점이 반대 명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가나의 정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벤구리온의 주장은 당연히 전적인 지지를 얻었다. 더 많은 첩자의 포섭과 방첩 부서의 신설 방안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신설된 방첩 부서는 '영국에 협조하는 유대인'의 색출과 '유대인 공산주의자'와 '내부에서 암약하는 불순분자'를 찾아내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부서 명칭은 리굴 헤그디(Rigul Hegdi)였다. 여행사 직원으로 위장하여 정보 활동을 한 바 있고 프랑스 외인부대 경력을 지닌 유대인 지도자가 이 방첩 부서의 지휘를 맡았다.

 

p.58-59

벤구리온은 1946년까지 다양한 유대인 지하 운동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초기 정착민들이 지녔던 불굴의 의지로 영국인과 아랍인 모두를 상대로 한 게릴라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대인 지휘관들은 이 무장 투쟁이 극도로 위험한 도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양쪽을 상대로 하는 전투는 그들의 군사력을 극도로 분산싴밀 것이었다. 실패할 경우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벤구리온은 전투에는 금기가 없다는 지침을 명령으로 하달했다. 그 후 발생한 사태의 잔인함은 실로 끔찍했다. 하가나에게 협조한 혐의를 받은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영국 군인들도 총격으로 사살되었으며 병영 건물이 폭파되었다. 아랍인들의 마을이 불태워졌다. 중세 시대에나 있었던 잔인함이었다. 이런 와중이었으므로 정보 활동은 하가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하가나는 역정보를 이용하여 유대인의 군사 동원 능력이 실제 이상이라는 인상을 영국과 아랍 측에 퍼뜨렸다. 영국군은 소문으로만 떠도는 허깨비 적을 쫓고 있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영국군의 사기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1946년 봄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미국은 10만 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영국이 받아들이라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이 중재안은 거부되었고 전투는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마침내 1947년 2월 영국은 1948년 5월까지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철수하기로 동의했다. 그 이후에는 UN에서 이스라엘 국가 문제를 다루기로 합의했다. 

 

p.62-63

1951년 3월, 드디어 벤구리온 수상은 5개 정보기관장을 모두 그의 사무실로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외 정보를 위해 새로운 부서를 신설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 부서에 관한 구상을 설명해 나갔다.

 

"부서의 명칭은 하 모사드 레 테움(Ha Mossad le Teum) 즉, '정보조정연구소'이다. 초기 예산은 2만 이스라엘 파운드이고 그 중 5,000파운드는 특수 임무용 예산으로 수상의 재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 인력은 다른 정보 부처로부터 충당하고 앞으로 '모사드'로 통칭된다. 행정 편의상 그리고 정치적 목적상 모사드는 외무부 관할로 들어가나 국내 정보 부서 신베트(Shinbet), 군 정보부 아만(Aman), 공군 정보 부대 및 해군 정보 부대를 각각 대표하는 고위 간부들을 참모로 포함시킨다. 이 참모들은 '정보 고객'들이 요청하는 특정 정보 요구를 모사드에 통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요청 사항에 이견이 있을 때에는 수상실에 보고해야 한다."

 

벤구리온 수상은 무뚝뚝한 어조로 이어 갔다.

 

"당신들은 모사드에 '쇼핑 리스트'를 보내라. 모사드는 나가서 '물건'을 가져와야 한다. '물건'을 어디서 어떤 가격으로 구입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수상은 신설 정보기관에 대한 일인 정보 감독 위원회 역할을 자임했다. 초대 부장 루벤 실로아에게 보낸 메모에서 벤구리온 수상은 "모사드는 내 밑에서 내 지시에 따라 활동하며 나에게 끊임없이 보고해야 한다"라고 지시했다. 모사드의 기본 운영 방침이 확정된 것이다. 이로써 1929년 9월 밤 아랍인들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정보의 필요성을 논의했던 예루살렘 모임 이후 28년 만에 그들의 후손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기관을 출범시켰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