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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영미소설

난생처음 도전하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by Diligejy 2023. 2. 6.

p.19

[햄릿]의 시작 장면에서 보여주는 초병들의 불안감과 으스스한 분위기는 작품 속 덴마크 왕국의 정치적 불안감을 암시한다. 나아가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처음 발표했던 1601년경 영국의 정치적 불안정서어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당시 영국의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미혼 상태로 마땅한 후계자 없이 늙어가다가 1603년 사망했다. 확실한 후계자 없이 군주가 사망하면 왕위 계승을 놓고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질 수 있기에 정국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집권 말기, 마치 어둠 속에 있듯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정권 교체기의 정치적 불안감이 작품 첫 부분에 잘 녹아 있다.

 

p.28-29

내 눈에는 뭔가 수상하고 의구심이 있는데 지금 덴마크에서는 아무도 권력자인 클로디어스 왕에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아부하고 충성하며 현실적 이득을 얻고 있다. 죽마고우 친구들은 물론 정숙해 보였던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 오필리어마저도 그에게 협조하고 있다. 햄릿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아, 세상만사가 다 지겹고 썩었고 의미 없구나. 아, 역겹도다. 세상은 잡초가 무성한 정원, 온통 더러운 것들이 다 차지하고 있구나. (1.2 135-137)

햄릿의 답답한 마음이 이해가 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가? 햄릿 말대로 순진하겍 원칙과 법을 지키고 양심적으로 사는 순수한 사람들보다 편법과 불법을 일삼는 사람들이 더 성공하는 세상은 아닌지. 약삭빠르게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사람들이 더 성공하기도 한다. 현실을 받아들이자니 청년의 순수함이 용납하지 않고, 그렇다고 저항하자니 힘이 없다. 힘은 없고 고민만 하는 청년 햄릿, 비겁하지만 자살로 도피하고 싶어도 이마저 신이 자살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맘대로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답답할 것이다.

 

p.30-31

하지만 어머니의 재혼이 그의 생각처럼 정말 어머니의 욕정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는지는 좀 더 생각해볼 일이다. 새롭게 왕이 된 클로디어스 입장에서는 조카 햄릿이 가장 강력한 정치적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는 위험한 정적 햄릿을 제거하려 할 수도 있다. 어머니가 클로디어스와 빨리 재혼한 것은 욕정이 아니라 권력 투쟁에서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모성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생각의 깊이가 얕은 햄릿은 이런 관점은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그저 세상의 악과 적당히 타협해서 무성하게 번창하는 천박한 잡초로만 볼 뿐이다.

 

p.32-33

클로디어스의 대관식이 끝난 후 클로디어스 왕의 최측근인 플로니우스는 프랑스로 떠나는 아들 레어티즈에게 아버지로서 몇 가지 인생의 충고를 해준다. 프랑스로 가는 배를 타기 직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부한다. 오늘날로 치면 외국으로 유학가는 아들에게 공항 로비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훈계다. 400여 년 전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충고라서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대목도 있다.

 

먼저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의 속마음을 남에게 섣불리 말하지 말라"(1.3 59)라고 충고한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 생각부터 먼저 드러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또 "모든 사람들의 말은 듣되 말은 적게 하라(Give every man thy ear, but few thy voice"(1.3.68)라고 충고한다. 말이 많으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는 "좋은 친구를 가려 사귀고 좋은 우정이 확인되면 그 우정을 너의 영혼에 쇠사슬로 잡아매라"(1.3.62-63)라고도 충고한다. 사회생활에서 좋은 인맥을 형성하고 그것을 잘 관리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 말도 마음에 든다. "싸움은 가급적 피하되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면 확실하게 혼내줘서 상대가 너를 겁내도록 만들어라 Beware / Of entrance to a quarrel, but being in, / Bear't that th'opposed may beware of thee." (1.3.66-67) 늘 싸움꾼이 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호인이 되는 것도 좋지 않다. 호인이 아니라 호구로 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겸손함과 약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예의상 겸손한 것 뿐인데 나약하게 보고 더 함부로 대할 수도 있다. 그래서 깡패같이 목소리 크고 거친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 않는가? 때로는 강한 사람보다 강해 보이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인이든 국가든 강해 보이는 상대에겐 약하고, 약해 보이는 상대에겐 한없이 강한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기에 강한 힘이 있어야 하고 때론 그 힘을 거칠게 보여줄 필요도 있다. 

 

p.41-42

햄릿은 만류하는 호레이쇼와 초병들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단호히 외친다.

내 운명이 나를 부른다.
My fate cries out. (1.4.82)

멋지고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상상해보라. 당신 같으면 으스스한 유령이 한밤중에 나타나 따라오라고 한다면 선뜻 따라가겠는가? 아마 두려울 것이다. 햄릿도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을 아는 남자다. 두렵고 무서운 길이라도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운명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지금 인생의 갈림길에서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가? 햄릿처럼 용기 있게 가야 한다. 특히 청춘이라면 더 용감하게 운명과 부딪쳐야 한다. 쉽고 평탄한 길을 너무 선호하지 말자. 평탄한 길은 인생의 조연들이 걷는 길이다.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주인공이 되려면 역경이 있고 두려운 모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쉬우면서 주연이 되는 길은 없다.

 

p.45-47

자식을 객지로 보낸 부모 마음이 늘 그렇듯이 아들을 프랑스로 보낸 폴로니우스도 아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렇다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당연히 잘 지낸다고 할 것이고, 상투적인 이 말을 아버지는 믿기 어렵다. 그래서 폴로니우스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들을 품행을 염탐하려 한다. 그는 하인 레이놀드 편에 생활비를 보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넌지시 아들에 대한 험담을 흘리고,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 아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어내라고 지시한다.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이다. 아들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떠본다. "덴마크에서 온 레어티즈라는 사람, 그 사람 아주 술고래야. 여자관계도 아주 복잡하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상대방도 맞장구칠 것이다. "맞아, 어제도 밤새도록 술 퍼먹더라고. 엊그제는 술 취해서 홍등가로 들어가던데." 물론 사실이 아니라면 "아니,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폴로니우스가 말하는 전형적인 '미끼 전략'으로써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유도심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거짓의 미끼를 던져서 진실이라는 잉어를 낚는다.
Your bait of falsehood takes this carp of truth. (2.1.61)

폴로니우스의 노련한 정치인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대방에 대한 정보는 힘이고 권력이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에도 유력 정치인들은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상대방의 비밀을 캐내는 이른바 "숨어서 엿보기(seeing unseen)"(3.1.33) 전략을 구사했다. 상대의 감춰진 정보를 캐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정치적이고 근대적인 권력 행위다. 그들은 오늘날처럼 조직적인 정보 기관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정보요원을 활용해서 함정을 파놓고 상대의 비밀을 캐내는 정보활동을 했던 것이다.

 

당시 영국사회는 종교 문제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에서 영국 성공회로, 그리고 또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군주에 따라서 국가의 종교가 바뀌고, 정권은 개인의 종교를 억압하고 탄압했다. 이런 현실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감추는 것은 하나의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 되었고, 상대의 종교를 염탐해 그를 공격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숨어서 엿보기"는 상대의 마음속 비밀을 캐려는 엘리자베스 1세 당시 영국 시대상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햄릿]은 정치적인 연극이다. 왕권이라는 권력을 놓고 클로디어스 왕과 햄릿 왕자가 일종의 정보전을 벌이기 때문이다.

 

폴로니우스가 아들 레어티즈를 염탐아듯이 클로디어스 왕도 햄릿을 염탐하려 한다. 그는 햄릿의 우울증과 광기의 원인이 뭔지 궁금하다. 유령을 통해 숙부의 비밀을 안 햄릿은 일단 광기를 가장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 또한 부패한 현실을 알면서도 당장 바로잡고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우울할 수밖에 없다. 클로디어스는 햄릿의 광기가 정말 단순 광기인지, 아니면 뭔가 정치적인 의도가 숨겨진 계략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차라리 단순한 광기라면 클로디어스 입장에서는 더 좋다. 유력한 정치적 라이벌이 자동 탈락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만약 햄릿의 광기 뒤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다면 이는 정치적 위협이고 사전에 파악해서 제거해야 할 것이다.

 

p.55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것이 더 고상하단 말인가?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밀려드는 재난에 맞서 싸울 것인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hether'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3.1 56-60)

 

p.62

왕이 말한다. "결심이란 기껏해야 기억의 노예일 뿐, 태어날 땐 맹렬하나 지탱할 힘이 미약하오. 열매가 아직 시퍼럴 땐 마무에 매달려 있지만, 무르익으면 그냥 둬도 떨어지는 버버이라오." (3.2 169-172) 결심을 해본 사람은 아마 공감할 것이다. 극 중 왕 말대로 대부분의 결심이란 처음에는 강력해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시들해져 흔들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는 열매처럼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p.63-64

상황 따라 변하는 게 어디 사랑뿐이랴. 왕은 말한다. "세도가가 권력을 잃으면 가깝던 친구도 떠나지만, 미천한 자라도 출세하면 적도 친구가 되는 법이오." (3.2 185-186) 옛말에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손님이 많으나 정승이 죽으면 손님이 없다고 했다. 시류에 따라 달라지는 게 인심이고 사랑이다. 극 중 왕의 말이 우리 마음을 건드린다. 한 구절 더 읽어보자.

 

우리의 의지와 운명이 엇갈려 달리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이 뒤틀려버린다.
계획은 내 것이지만 그 계획의 결말은 내 것이 아니다.
Our wills and fates do so contrary run 
That our devices still are overthrown;
Our thoughts are ours, their ends none of our own.
(3.2 192-194)

누군가 안 되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많은 계획과 결심을 하지만 안 되는 것도 많다. 계획은 인간이 하지만 그 계획을 이루는 것은 신의 몫이다. 극 중 왕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왕비에게 이렇게 말하며 그녀가 곧 변심할 것을 암시한다. 흥미롭게도 왕의 이 말처럼 햄릿과 클로디어스가 상대방에게 계획한 것들이 모두 뒤틀려버린다. 모든 것이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p.72-73

실성한 오필리어가 인물들에게 꽃을 나눠준다. 오빠에게는 꽃말이 '저를 기억해주세요'인 만수향(rosemary)을, 거투르드 왕비에게는 '배우자에 대한 배신'을 뜻하는 매발톱꽃(columbines)을, 클로디어스에게는 '후회'를 뜻하는 운향꽃(rue)을 준다. '불행한 사랑'을 뜻하는 실국화(daisy)는 자기가 갖는다. 햄릿과의 불행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충성'을 상징하는 오랑캐꽃(violet)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시들었다"(4.5 180)라고 말한다. 클로디어스 왕에게 충성했던 아버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때론 미친 사람이 더 똑똑하고 진실에 가깝다. 현실의 모든 의식적 억압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오필리어가 실성한 상태에서 각자에게 맞는 꽃을 준 것이다.

 

p.79-80

성서에서는 최초의 인간을 아담(Adam)이라 불렀다. 아담이라는 말은 '흙'을 의미하는 아다마(Adamah)에서 나왔고, 휴먼(human)이라는 말 역시 '흙'을 뜻하는 후무스(humus)에서 유래했다. 결국 모든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햄릿은 무덤 파는 장면에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진리를 깨닫는다. '메멘토(기억하라)'와 '모리(죽음)'가 합쳐진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인간은 언제가 죽을 필멸의 존재임을 깅거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이고도 가장 확실한 팩트다. 다만 우리가 잊고 지낼 뿐이다.

 

영원히 사는 신들과 달리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로마 호라티우스의 시구절에서 나온 표현으로 'carpe'는 '잡다' 또는 '즐기다'를, 'diem'은 '오늘'을 의미한다. 따라서 carpe diem은 내일은 믿을 수 없으니 오늘에 충실하고, 오늘을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즐기라.' 예고된 죽음이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을 늘 인식하고, 살아 있는 이 순간을 후회 없도록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 현명하다.

 

p.82-83

햄릿은 인생사 모든 것이 인간의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 일을 완성하는 신의 섭리가 있음을 인식한다.

 

때로는 고민 없이 그냥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허사가 될 수도 있는 법인이까.
인간이 대충 일을 벌여놓지만
마지막 손을 보아 완성하는 것은 신이다.
Our indiscretion sometimes seves us well
When our deep plots do pall, and that should learn us
There's a divinity thaht shapes our ends,
Rough-hew them how we will (5.2 7-11)

 

햄릿의 복수 계획, 클로디어스의 햄릿 살해 계획, 코젠크렌츠와 길덴스텐의 출세, 모든 게 인간이 의도하고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햄릿은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인간의 계획을 가다듬고 완성하는 신의 손길이 있음을 인식한다. 이것은 햄릿의 성숙을 의미한다.

 

p.99-100

이아고가 비유적으로 말한다. "나의 진정한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느니 차라리 내 심장을 소매 끝에 내놓고 비둘기가 파먹게 하겠어요."(1.1.65) 여기서 심장은 나의 속마음, 진실을 의미한다. 나의 가장 소중한 심장, 가슴속 깊은 곳에 안전하게 보관된 그 심장을 꺼내어 옷소매에 내놓고 다닌다고 상상해보라. 아마 새들이 몰려와 쪼고 파먹으려 할 것이다. 매우 위험한 짓이다. 물론 정직해야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본심을 감출 수 있는 영악함도 필요하다.

 

훌륭한 발레 무용수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질은 고난도 발레 기술만이 아니다. 고난도 기술도 중요하지만 발레 연기 내내 아름답고 우아하게 표정 관리를 할 수 있는 능력도 필수적이다. 발가락 끝으로 서서 회전하려면 분명 고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감추고 찡그린 얼굴이 아니라 아름답곡 우아한 미소를 보여줄 수 있을 때 훌륭한 발레 무용수가 될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p.107-108

원래 남자들은 자기 여자 친구들한테 군대 무용담을 과장해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던가. 실제로는 취사병으로 근무했지만 여자 친구 앞에서는 탱크 몰았다고 허풍을 떠는 게 남자다. 설사 과장된 거짓말임을 알더라도 진짜인 것처럼 속아주며 재밌게 들어주는 여자친구가 참 고맙고 좋은 법이다. 오셀로가 전하는 흥미진진한 무용담은 영국이 한창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해외 신대륙에 대한 대중적 호기심을 잘 반영하고 있다. 

 

p.113

브라반쇼가 떠나는 오셀로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이 애를 조심하게 무어인, 눈여겨서 잘 보라고. 아버지를 속였으니 자네도 속일지 모르네." (1.3.288)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르겠다. 장인이 막 결혼한 사위에게 하는 말치곤 말 속에 뼈가 있다. 이 말에 오셀로가 대답한다. "네, 그녀의 정절에 제 생명을 걸겠습니다."(1.3.289) 아내의 정절에 자신의 생명을 걸겠다는 남편! 이 말 또한 부담스럽고 마음에 걸린다. 장인과 사위 간의 마지막 뼈 있는 대화에는 묘한 복선이 깔려있다.

 

p.114-116

브라반쇼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오셀로를 사위로 삼았다. 어리고 순진하게만 생각했던 딸도 아버지 앞에서 당돌하게 자기주장을 분명히 한다. 아버지 입장에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우울한 아버지를 공작이 위로한다.

 

이미 지나가버린 불행한 일을 계속 슬퍼하는 것은
더 많은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고,
운명의 여신이 준 불행을 참아내면
오히려 그 운명의 여신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
To mourn a mischief thaht is past and gone
Is the next way to draw new mischief on.
What cannot be preserved when fortune takes,
Patience her injury a mockery makes. (1.3.202-205)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불행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더 많은 불행을 불러오게 된다. 그러니 지나간 불행은 그냥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과거의 아픔에 매여 있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악순환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 또 한명의 우울한 사람이 있다. 데스데모나를 짝사랑하던 베니스의 백인 청년 로더리고. 데스데모나가 이제 오셀로와 합법적으로 결혼해서 함께 떠나자 낙심한 그는 자살하겠다고 말한다. 동지처럼 함께 오셀로를 욕해주던 이아고가 그를 위로한다.

 

우리의 몸은 정원이고, 우리의 의지는 그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와 같다.

Our bodies are our gardens, to the which our wills are gardeners. (1.3.313-314)

 

이아고는 악인이지만 멋진 말도 잘한다. 내 마음의 정원에 예쁜 꽃을 심을지, 아니면 독초를 심을지, 그것은 내가 정한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결국 삶은 내 마음, 즉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너무 쉽게 낙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시간의 자궁 속에는 많은 일들이 들어있다.
There are many events in the womb of time which will be delivered (1.3.353-354).

시간이라는 자궁 속에는 무궁무진한 일들이 들어 있기에, 그곳에서 어떤 것이 출산되어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한마디로 내일 일은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은 성공했지만 시간의 자궁 속에 내일의 실패가 들어 있을지 모르고, 오늘은 실패했지만 그 속에 내일의 성공이 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오늘 일에 너무 절망하거나 너무 우쭐해할 필요는 없다. 오늘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와 결혼했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아고는 그녀가 곧 오셀로에게 싫증을 느끼고 다른 남자를 찾을 것이니 바로 그때를 대비하자고 말한다.

 

p.125-126

사이프러스는 터키 남쪽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 무대 가운데 하나이고 '신들의 섬'이기도 하다. '아프로스aphros, 흰 거품'가 이 섬 해안에 닿아 탄생한 것이 바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다.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은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사랑의 여신이 태어난 곳이라서 그럴까? 영어로 '사이프리언Cyprian'은 사이프러스 섬사람을 뜻하지만 '음란한 여자', 즉 매춘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이프러스 섬은 금욕을 강조한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제논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교육학 용어 '피그말리온 효과'는 바로 사이프러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에서 나왔다.

 

p.143

이 손수건을 캐시오의 방에 놓고
그가 발견하도록 해야지. 질투하는 사람에겐
공기처럼 가볍고 하찮은 물건이라도
성경처럼 강력한 증거가 되는 법이니까.
I will in Cassio's lodging lose this napkin
And let him find it. Trifles light as air
Are to the jealous confirmations strong
As proofs of holy writ. (3.3.322-325)

 

그는 데스데모나가 잃어버린 손수건을 캐시오의 방에 놓아 캐시오가 그것을 소지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이 작은 손수건이 그의 말처럼 성경처럼 강력한 물증이 되어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이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질투 같은 '위험한 상상'은 마음에는 독약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독약처럼 온몸과 마음을 오염시켜서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p.161-162

오셀로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살려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다. 슬프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 도대체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한 게 맞는가? 그가 외쳤던 "오, 내 영혼의 기쁨이여!"는 거짓이란 말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 말은 진심이었고 그가 데스데모나를 사랑한 것도 진실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은 걸까. 그는 왜 아내의 말보다 이아고의 말을 더 신뢰하는가? 좋은 질문이다. 대답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지금 오셀로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냉철한 이성을 잃고 흥분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셀로는 지금 자신이 베니스 주류 사회의 남성인 양 착각하고 있다. 사실은 베니스에 고용된 외국인에 불과한데 자신이 이아고처럼 베니스 남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베니스 주류 사회의 남성적 질서를 위반한 여성 데스데모나보다 베니스 사회의 남성적 질서를 대변하는 이아고의 말을 더 신뢰한다. 이는 오셀로의 심각한 착각이고 결정적인 패착이다.

 

p.164-166

[오셀로] 마지막 장면을 강의할 때 학생들로부터 자주 듣는 질문이 하나 있다. "왜 셰익스피어는 죄 없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를 죽게 하는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쁘게 사랑하는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다. 특히 정숙한 데스데모나의 죽음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는 항의성 질문이다. 매우 일리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셰익스피어를 대신해서 대답해준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을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관점이 아닌 냉정한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정치적으로 볼 때 데스데모나의 죽음은 전복적인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다. 그녀는 아버지 몰래 무어인과 비밀 결혼을 하고 전쟁터에 따라가면서 여성의 과도한 성적 욕망을 드러냈다. 이는 당대의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를 위반하는 도전적인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게다가 캐시오의 복직을 요청하면서 남편의 공무에 간섭하기까지 했다. 이런 도전적인 여성에게 남성이 주도하는 준엄한 사회적 처벌이 필요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성인 오셀로는 왜 죽었어야 했는가? 그는 군인으로서 군사적 공로를 세웠지만 무어인이기에 베니스 백인 남성사회에서는 인종적 타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셀로는 자신을 베니스 사회의 지배적인 남성과 동일시하고 백인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이방인이다. 백인 입장에서 볼 때 당연히 응징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백인인 이아고와 로더리고는 무어인 오셀로의 베니스 백인사회 진입과 백인 헤게모니에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봉쇄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무어인 오셀로는 무어인을 경멸하는 베니스 주류 사회와 달리 오히려 무어인이지만 그를 선택하고 사랑한 데스데모나를 믿지 못하고 그녀를 직접 살해했다는 점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마지막에 자결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경멸받는 베니스 사회의 타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베니스를 두둔하는 말을 하면서 죽는다. "한번은 알레포에서 머리에 터번을 두른 심술궃은 터키 놈이 베니스인을 때리고 그 나라를 욕했을 때 내가 그 할례받은 개놈의 목을 잡아 질렀다고 전해주시오. 이렇게"(5.2.348-351)라면서 자신의 목을 칼로 찌른 것이다. 당시 알레포에서 기독교인이 터키인을 죽이는 것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오셀로는 자신이 베니스인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했다. 자신을 인종적으로 경멸하는 베니스인들을 위해서 말이다. 심각한 모순이다. 착한 건지 바보인지 모르겠다. 

 

[오셀로]를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사람이 너무 착한 것도 위험하지 않을까? 세상은 영악한데 나만 너무 순진하면 이용만 당할 가능성이 높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선까지만 순진하면 좋겠다. 물론 착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세상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p.170

당시 제임스 1세는 마녀에 관심이 컸고 마녀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는데 고오교롭게도 이 작품은 마녀들의 대화로 시작한다.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는 궃은 날, 황야에 세 마녀가 나타난다. 마녀 하나가 말한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까? 천둥 칠 때, 번개 칠 때, 혹은 비 올때?" 다른 마녀가 대답한다.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 싸움에 지고 이겼을 때(When the hurly-burly's done, / When the battle's lost, and won." (1.1.1-4)

 

무슨 말인가. 마녀들의 말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 "hurly-burly"란 큰 소동이나 난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반란군과의 전쟁을 말한다. 현재 던컨 왕이 지배하는 스코틀랜드 왕국에 반란이 일어나서 충신 맥베스 장군이 반란군을 진압하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란 반란군과의 전쟁이 끝난 후를 의미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싸움에 지고 이겼을 때"라는 말이다. 어떻게 싸움에 지고 또 이길 수 있단 말인가.

 

p.206-207

우리는 흔히 매일매일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매일매일 죽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루하루, 그리고 매 순간마다 우리는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 불편한 진실을 맥베스가 지금 말하고 있다. 햄릿이 각성했던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삶의 가장 기초적인 본질을 그도 지금 각성하고 있는 것이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 같은 인생이여,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 치고 떠들지만
곧 사라지는 배우와 같다.
인생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소음과 광기가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5.5.22-27)

맥베스는 인생을 짧은 촛불과 연극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 세상은 무대이고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연극의 배우에 불과하다. 배우의 배역이란 팩트가 아니라 허상에 불과하다. 영구적인 내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맡은 역할일 뿐이다.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호랑이가 아니라 잠시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을 호랑이라고 착각하면 오해다. 무대 위에 있을 때 그렇게 큰소리치고 활개 치던 배우라도 연극이 끝나면 모두 사라진다. 영원히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는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현직 시절 그렇게 막강한 힘을 휘두르던 사람도 퇴직하면 초라한 동네 노인네에 불과하다.

 

p.220-221

사랑을 말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행동으로 하는 것인가? 물론 말로도 표현하고 행동으로도 보여준다면 최고로 이상적일 것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코델리어식 사랑은 분명 가치 있고 아름답다. 그러나 때로는 언니들처럼 설사 그것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듣기 좋은 말로 표현해줘야 하지 않을까? 표현하지 않는 사랑을 상대가 느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p.233

광대가 리어 왕을 풍자하는 것을 더 들어보자.

 

가진 것을 다 보여주지 말고,
마음 속 생각을 다 말하지 말고,
가진 것을 다 빌려주지 마라.
말을 탈 수 있을 때 걷지 말고,
듣는 것을 다 믿지 마라.
Have more than thou showest,
Speak less than thou knowest,
Lend less than thou owest,
Ride more than thou goest,
Learn more than thou trowest. (1.4.103-107)

 

p.245-247

권력은 줘버리고 권위는 유지할 것으로 생각하는 리어 왕은 어리석다. 권위는 권력, 즉 힘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권력의 핵심은 재력, 즉 영토다. 재력은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다. 그런데 리어 왕은 권력의 원천인 그 영토를 이미 딸들에게 다 줘버린 것이다. 그는 지금 왕으로서의 권력도 권위도 없다.

 

어리석은 리어 왕은 모르지만 '현명한 바보' 광대는 정확하게 알고 풍자한다.

 

누더기를 걸친 아버지는
자식을 소경으로 만들고,
돈주머니를 찬 아버지는
자식을 친절하게 만든다.
Fathehrs that wear rags
Do make their children blind,
But fathers that bear bags
Shall see their children kind. (2.4.44-47)

 

부모가 물려줄 유산이 많으면 자식들이 친절하지만, 없으면 자식들이 부모의 어려움에 모른 척 한다는 말이다. 400여 년 전 광대의 농담이지만 우리에게도 무겁게 들린다. 이렇게 셰익스피어는 불편하지만 적나라한 인간의 보편적 본서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명한 바보의 말을 하나 더 들어보자.

 

행운의 여신은 매춘부,
가난한 사람에겐 문을 안 열어준다.
Fortune, that arrant whore,
Ne'er turns the key to th'poor. (2.4.48-49)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 [햄릿]을 읽을 때 설명한 적이 있다. 서양 고전문학에서 행운의 여신은 자주 매춘부로 표현되었다. 지조 없이 쉽게 변하기 때문이다. 광대는 "매춘부" 같은 "행운의 여신"이 구차한 사람, 즉 "가난한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차해져서 상황이 어려워지면 행운도 따라주지 않고 외면하는 법이다. 자식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광대는 지금 리어 왕의 성급하고 어리석은 유산 상속을 꼬집고 있다.

 

p.254-255

비참함과 고통 속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의 정신이 성숙되고 감겨 있던 두 눈이 개안되어 삶의 진실을 보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리어 왕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한다.

 

나는 여태껏 이런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호화로운 자들이여, 좋은 약이 될 것이니 이런 것을 경험해보아라.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말이다. 이 비바람을 맞아보곤 너희의 남은 것들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어 하늘의 공평함을 느끼게 하라. (3.4.32-36)

 

리어 왕은 과거에 자신이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에 무관심한 군주였음을 깨닫는다. 과부가 과부 사정을 안다고 사람은 자신이 어려워봐야 타인의 어려움도 알 수 있다. 리어 왕은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이 자연에게서 잠시 "빌려 온 것(lendings)"(3.4.97)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빌려온 것은 언젠가 돌려줘야 한다. 내 것이 아니다. 리어 왕은 지난날 자신의 왕국, 권력, 영토, 이 모든 것을 자기 것인 양 착각했고, 그것들을 남용했다. 그리고 현명하지 못한 주관적 판단으로 왕국을 분할하고 딸들에게 상속했다. 이제 리어 왕은 교만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을 발견하고 고통 속에서 성숙해지고 있다.

 

p.264

아이러니하게도 글로스터는 콘월에게 두 눈을 뽑히고 나서야 진실을 제대로 보게 된다. 눈이 있을 때는 못 보다가 오히려 눈이 뽑히자 진실을 보는 것이다. 건강할 땐 몰랐는데 아파보니 건강의 소중함을 안다. 그 흔했던 청춘의 시간들이 다 흐른 후에야 그때가 소중했음을 알게 된다. 있을 때는 모르다가 잃은 후에 알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눈 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가끔씩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는지 말이다. 두 눈을 잃은 글로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눈이 있어 볼 때는 오히려 넘어졌다.
눈 같은 편리한 수단이 있으면 방심하지만,
그런 것이 없으면 도리어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 된다.
I stumbled when I saw, Full oft'tis seen,
Our means secure us, and our mere defects
Prove our commodities. (4.1.19-21)

 

p.275-276

리어 왕이 달라졌다. 예전의 어리석었던 리어 왕이 아니다. 그는 광기 속에서도 현실을 꿰뚫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촌철살인같이 예리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누더기 사이로는 작은 죄도 훤히 드러나지만,

관복과 비싼 모피 외투는 모든 죄를 감추어준다.

죄에 황금 도금을 입히면

튼튼한 정의의 창도 맥없이 부러진다.

하지만 죄에 누더기를 입히면

난쟁이의 지푸라기라도 꿰뚫을 것이다.

Through tattered clothes great vices do appear:

Robes and furred gowns hide all. Plate sin with gold,

And the strong lance of justice hurtless breaks;

Arm it in rags, a pigmy's straw does pierce it. (4.5.156-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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