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압도된 적이 있었을까.
아우라 라고 하는 건 이런 것이다 라는 걸 보여준 영화였다.
감독은 지겨울만큼 계속해서 모순에 집착한다.
'길복순'이라는 캐릭터부터 그렇다.
길복순이라는 이름만 보면 시골의 순박한 옛날 여성일거 같은 것 같지만,
가장 최신의 차가운 도시 여자가 길복순이다.
어쩌면 '길복순'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길모순'이라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
복순이라는 이름도 모순적이다.
그녀의 삶에 '복'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지만, 엄청난 가정폭력범이었고,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경찰이었지만, 딸이 담배를 폈다며 담배를 먹이는 아동학대범이었다.
주님께 자신의 딸을 용서한다며 자신의 죄도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며 피흘리고 있는 그녀에게 담배를 먹인다. 삼키기까지 하라고 한다. 말도 안되는 엽기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우아하고 자상한 말투로 "삼켜야지"라고 말한다.
그녀의 후배 '한희성' 또한 마찬가지다. 남들 앞에서는 그녀를 견제하고 결투를 신청할듯 으르렁대는 이미지를 보이지만, 그녀와 섹스를 하는 선후배 관계다. 남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을 하면서도 도덕을 논하는 인물이다.
길복순도 마찬가지다. 길복순이 '작품'을 할 때 그녀는 피해자가 변태였을거라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청부살인업계도 마찬가지다. 청부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이면서도 '회사'라는 합법적인 집단을 표방하며, 허가받지 않은 청부살인은 하지 말고, 미성년자는 죽이지 말고, 회사가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규정'을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규정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인턴' 직원까지 죽인다.
MK 엔터테인먼트에서 B등급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으니 길복순을 죽이라는 한마디에 그동안 같이 술마시던 업계동료들은 한순간 적이 된다. 이것도 모순이다.
길복순을 둘러싼 세상은 눈뜨면서부터 눈감을때까지 모순이 아닌게 없었다.
길복순은 그런 모순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음 수를 읽는 능력을 키웠다. 상대가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 이것이 그녀가 이 모순 속에서 살아남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수읽기 능력도 자신의 딸인 길재영에겐 통하지 않는다. 복순은 차민규에게 자신의 딸은 예측이 안된다며 토로한다. 자신에게 벽을 치고 있다고 말이다. 차민규는 그런 복순에게 기달리라는 말을 한다. 열어줄때까지. 어쩌면 이 말은 복순에게 한 조언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복순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게 아니었을까.
복순이 재영을 읽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재영은 모순 속에서 '쪽팔리게' 살기 싫어한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것도, 자신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도 엄마에겐 숨기지만 모순을 가지고 살진 않는다. 들키면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이용해 1달간 사귀자는 유철우의 '모순'에 대해 목을 찌르며 저항한다.
그녀가 유철우와 나눈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야 의미가 좆또 뭐가 중요해. 애들한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거지."
어쩌면 이 영화의 핵심 주인공은 복순이 아니라 재영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건 길복순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복순의 대사, 행동은 모두 재영에게 영향을 받고 재영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마지막 그녀가 차민규를 죽이고 죽이는 걸 재영이 알게 되었어도 재영이 "수고했어"라는 말로 그녀에게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구원을 베푸는 것도 모두 재영의 의사대로 진행되었다.
매일같이 만나는 현실의 모순들이 처음엔 견디기 어렵다가, 견뎌지고, 무던해진다.
그리고 이런 모순 속 무도회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어떻게 보이느냐'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런 모순이 자기가 된다.
이런 걸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자신 때문에 회사에서 잘린 영지에게 복순이 말하는 장면이다.
"세상을 살면서 말이다. 때로는 잘못을 안해도 잘못이 되고, 잘못을 했는데도 잘못이 안되고 그러는거야."
"그런게 어딨습니까?"
"예를 들면, 니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치자. 그건 니가 잘못한게 아니잖아. 근데 남들은 그걸 잘못이라 볼 수 있어."
...
"잘못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아요. 남들이 정하는게 아니라."
"하여간 요즘애들은... 정말 똑똑해"
영지와 재영은 모순이 아닌 반대편에 서있는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스스로 규정하는 사람들이다.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이런 영지와 재영은 복순을 끌어들이고 조금씩 변화시킨다.
모순이 깨져가는 과정에서 복순은 계속해서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맞서기 시작한다.
그녀는 스스로 규정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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