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2-13
많은 시간을 멕시코,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과 그 이후의 금융위기를 다루는 데 보냈지만, 당시 미국의 상황은 수백 년 만의 태풍처럼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버냉키, 폴슨과 나는 이미 전체 금융시스템을 위한 7천억 달러의 개입 대책인 부실 자산 구제 프로그램(Troubled Asset Relief Program - TARP)까지 포함하여, 거대 금융기관에 구제금융을 연속 주선했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를 끝내지 못하였다. 기업 부도위험을 측정하는 지표는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 투자은행의 주식이 폭락하고 채권시장이 걷잡을 수 없던 당시보다 더 높았으며, 안전하다고 인식되던 금융상품인 MMF까지도 흔들렸다. 주택 경매율은 사상 최고였고, 경제는 매월 75만 명 이상의 실직자를 내고 있었다.
p.15-17
씨티와 뱅크오브아메리카는 폭탄 중 가장 규모가 컸다. 분노의 대상인 '대마불사too-big-to-fail'의 1호와 2호라 하겠는데, 재무부 책임자들은 이들을 '금융의 큰 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온 세계의 금융은 취약한 반면 이들의 영향력은 너무나 커서, 우리가 대공황의 재현, 은행권의 몰락, 그리고 25%의 실업률 및 수천 여개 기업의 폐업을 모면하려면 이들이 시스템을 쓰러뜨리지 않도록 지켜 줘야 했다. 설사 그러한 구제금융이 무모한 행동을 했던 자들의 손실을 보전해 주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폭탄들은 신임 대통령의 결제에 올리기에 개수도 많았지만, 폭탄 자체보다도 더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자본이 고갈된 상태로 금융시스템을 날려 보낼 수 있는 5개 기업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금융권의 자본 손상이 심각했다. TARP 투자와 다른 긴급 지원 대책을 시행한 이후에도, 경제회복 재원은 차치하고 잠재 손실을 충당할 돈이 부족했다. 서머스와 나는 신정부가 경제를 복구하는 데 충분한 현금 또는 충분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지가 우려되었다.
뉴욕 Fed 소속 내 옛 동료들은 "은행권이 생존하려면 불황의 경우에 추가로 2,900억 달러, 극단적인 스트레스 시나리오에서는 6,840억 달러가 소요될 수 있다."고 비공식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수치에는 AIG와 같은 비은행 금융기관을 안정시키는 잠재비용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파산 기로에 서 있는 제너럴 모터스와 크라이슬러의 구제를 위한 잠재비용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TARP 기금의 미사용 잔액은 약 3,000억 달러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서머스와 나는 "의회가 더 이상의 구제금융 입법 의지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추가 TARP를 요청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고 대통령에게 진언했다.
나는 "어떤 대책이 주효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75년 동안에 이러한 위기가 발생한 적이 없고, 이같이 복잡한 위기도 없었다. 은행과 다른 금융회사를 복구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에 충분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이미 대통령은 상실한 소득과 재산을 상쇄하고 수요를 회복시키며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 8,000억 달러의 정부 지출과 감세라는 막대한 경기부양법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Fed도 또한 통화정책을 통해서 부양책을 확대하고 있었다.
구제금융, 재정 및 통화 부양이 효과를 보려면, 자동차산업과 주택 부문을 지원하려는 대통령의 노력과 동반돼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시급한 문제는 금융시스템의 안정이었다. 은행의 패닉이 재현된다면 우리가 쏟아부은 어떤 재정 및 통화 부양책도 금방 뒤집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서머스와 나는 "위기에 계속 끌려가기보다는 앞서 가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우리는 대중들이 "정부가 구제 금융에 이미 너무 많이 쏟아부었다."고 생각하지만, 정부는 "실패하더라도 부족하기보다는 과도한 조치를 하는 쪽에 승부수를 걸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직언했다. 긴급 상황에서 임시변통의 대책은 적극적이고 압도적인 대책보다 위험하며, 궁극적으로 납세자들에게 세금뿐만 아니라 실업, 기업 도산 및 주택 경매 면에서 더 값비싼 부담을 줄 것이었다.
대통령은 이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참을성 있게, 당황하지 않고 들었다. 그의 정책 방향은 금융문제를 지고서 절뚝거리며 가거나 덮어 두지 않고, 신속한 조치로 금융시스템 전체를 복구하고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공격적이고 포괄적인 조치를 원했다. 대통령은 "우리는 반드시 반창고를 벗겨내야 한다. 나는 이를 제대로 끝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나는 대통령의 정책에 조건부로 동의하였다. 나는 "부실 금융회사를 국유화 또는 청산하거나, 그 채권자로 하여금 원금에 미달하는 할인상환haircut을 수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이러한 혼란 사태를 초래한 월스트리트 도박꾼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결연하고 강경한 조치는 정당하지만, 불확실성의 시기에는 신뢰도를 손상시키고, 하향 소용돌이를 가속시킬 것이다. 전년도 가을에 발생한 패닉에서 볼 때, 그러한 상황이 오면 월스트리트만이 아니라 산업계를 손상시킬 것이다. 우리는 1990년대 이후 일본이 겪은 장기간의 사태를 피해야 했지만, 또 한 차례의 대공황의 상처도 피해야 했다.
"우리는 분명히 반창고를 벗겨야 하지만, 우리의 금융시스템을 절대 깨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대통령은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서머스가 설명하였다. "장관의 말은, 취약한 시스템을 흔들고, 신뢰를 날려버려 주식시장을 폭락시키는 일은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p.21-23
2월 9일에 대통령은 1년 만에 실업률이 5.2%에서 19.1%로 급등한 인디애나 주 엘크하르트 시에서 자신의 재정 부양법안에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의 최초 기자 회견에서 그는 "재정 부양은 위기 해법의 일부에 불과하며,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어 대출이 다시 돌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내일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명확하고 특별한 계획을 몇 가지 발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추가설명을 요구했지만, 대통령은 하루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는 "나는 장관보다 앞서 가지 않고 그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고 말함으로써 대중들의 기대치를 한껏 높여 놓았다.
나는 소수의 자문 그룹을 두고서 금융 안정전략 수립과제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기본적인 체계만을 갖추었을 뿐이어서 계획의 내용 발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팀 내부에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여 "출범 시에는 다수의 세부 사항들이 불투명한 상태일 것이다. 이로 인해서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증폭될 수 있다"라는 메모가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의 전략은 서머스를 포함하여 다른 동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또 하나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대중 앞에서 나의 첫 기자회견에 신뢰를 표현하였고, 백악관 기자단에게 "장관의 회견장에 오라."고 촉구하였다. 대통령은 "장관의 발표는 대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회의적이었다. 재무장관은 신뢰감을 주어야 하는 직책이다. 달러 지폐에 재무장관의 서명이 새겨진다. 명확하고 침착하게 능력과 믿음을 전달하는 공적 이미지가 실질적 정책만큼이나 신뢰를 얻는 데에 중요하다. 그러나 나의 성향은 그렇지 못헀다. 나는 내 경력의 대부분을 무대의 뒷전에서 보냈다. 고교 시절 이후, 나는 대중에게 연설하기를 두려워했다. 취임 당시 처음으로 전 세계를 상대로 발표하게 되었는데, 프로젝터 리모컨 사용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전달할 메시지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위기를 겪어오면서, 그 예측 불가능함과 안갯속에 갇힌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던 시기에, 나는 나도 갖고 있지 못한 신뢰를 공표할 방안에 확신이 없었다.
내 이미지뿐만 아니라, 청문회 인준과정도 험난했기에, 내가 반드시 언급해야만 하는 정책이라도 성난 대중들이 인정할 것 같지 않았다. 준비한 발표문도 누가 보더라도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할 내용으로 보였다. 금융권에 정부의 추가 지원을 약속한 것인데, 이것은 구제금융에 넌더리를 치는 대중들이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재무부 내에서 장관의 정책에 논란이 많다는 사실도 부처 밖에서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전략이 상당히 생소하다는 것이 더욱 인정받기 어려운 점이었다.
우리는 주요 은행이 쓰러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지만, 국유화시킬 의도도 없었다. 두 가지 모두 대중들도 잘 아는 것으로서, 만일 실행시킬 경우 패닉을 가속화하지만, 정책으로서 설명하기에는 쉬울 것이다. 반면 우리가 채택한 접근방식은 '스트레스 테스트'가 그 핵심인데, 이러한 명칭은 정책조치라기보다는 분석절차처럼 들렸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여 위중한 상황에 얼마나 대응할지 파악하듯이, 감독 당국이 주요 금융회사의 재무제표를 검토하여 진짜로 재앙적인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필요한 추가자본을 계산한다. 그러고 나서 금융사들로 하여금 부족한 자본을 채울 만큼 금액을 조달하도록 한다. 만일 부실금융회사가 민간투자자로부터 충분한 자본을 조달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부족분을 강제로 투입한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스트레스 테스트는 엄격한 테스트 이상의 것으로서, 금융권의 자본을 확충함으로써, 은행 성장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은행에 정부 지원 없이도 생존 소요자본을 조달할 수 있음을 입증할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정부는 팔짱 끼고서 은행이 쓰러지도록 놔두지 않는다. 우리는 가능한 한 민간자본에 의존하지만, 필요하다면 공적자금 조달로 전환한다. 스트레스 테스트는 근본적으로 건전한 곳을 부실한 곳과 분리하게 시키는 일종의 부상자 분류절차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금융시스템이 대공황 수준의 손실을 확실히 감당하도록 만들면, 대공황의 재현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우리는 세부내용을 발표할 준비는 안 되어 있었고 스트레스 테스트가 어떻게 작동할지 알아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나의 연설도 그만큼이나 모호하였다. 나는 은행을 부실자산의 일부를 매입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언하면서도, 아직 준비는 안 되었음을 인정할 것이었다. 나는 주택 위기를 처리할 포괄적 계획을 약간의 부연설명과 함께 약속할 것이었다. 그리고 혼란스런 인출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서, 리먼 브라더스 형태의 도산은 더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표명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목은 26개 문장 속에 둘러싸여 묻혀버렸다.
p.26-28
역사에 따르면 완만한 위기더라도 일단 발생하면 크나큰 고통을 가져다준다. 20세기의 14건의 심각한 경제위기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해당국에서 실업은 평균 77% 증가하였다. 이들 국가 다수가 은행의 대부분, 또는 전부를 국유화했다. 금융위기는 또 납세자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정부가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지출한 금액인 직접 재정비용은 평균적으로 GDP의 10%로 미국의 경우 약 1.5조 달러에 달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위기는 전혀 완만한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금융위기 및 대공황 당시보다 5배나 악화된 가계자산의 상실과 함께 시작되었다. 리먼 파산 시점의 채권 스프레드는 1929년의 두 배나 되었다. 심각해진 투자자들은 금을 매입하여 마당에 묻어 둘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주식은 2007년 최고치 대비 절반 아래로 하락하였다.
대부분 분석가들이 금융시스템을 복구하려면 미국의 납세자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부담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국제통화기금의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사이먼 존슨은 타국의 경우에 비교하면, 미국 정부의 지급 가격이 1조에서 2조 달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였고 IMF의 한 연구에서도 구제금융의 액수를 2조 달러 가까이 추정헀다. 하원의 정부 감독위원회의 다렐 이사 의원은 "우리가 예수 탄생일로부터 매일 1백만 달러를 지출하더라도 아직 1조 달러에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이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구제금융으로 그만큼의 금액을 잃지 않았다. 우리의 성과는 과거의 위기나 이번 위기에서 다른 국가들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았다. 미국이 훨씬 나았다. 그해 여름까지 미국은 공황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는 성장을 재개하였다. 주택 가격이 안정되었고, 얼어붙었던 신용시장이 녹았다. 그리고 우리의 구제금융 투자는 납세자의 돈을 갚아 주었다. 아직도 대다수의 미국인은 정부가 수십 억 또는 수조 달러의 금액을 은행 구제금융에 넣었다고 믿는다. 실제로는, 금융권은 모든 정부 지원금을 상환하였고, 5대 폭탄 기관은 구제금융을 포함한 위기대응에서 납세자들의 이익을 실현했다. 우리는 우리의 한정된 재원이 너무 염려스러워서 대통령의 최초 예산에 2차 TARP를 위한 7,500억 달러의 예비예산을 넣어 놓았었으나, 궁극적으로 의회에 10센트도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p.29
2007년에서 2009년의 불황은 대공황 이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최악의 시점 당시 15조 달러의 가계 자산이 사라졌고, 잘 관리되고 있다고 생각되던 미국인들의 연금과 대학기금이 손상되었다. 거의 9백만 명이 실직했고, 9백만 명이 빈곤층으로 떨어졌으며 5백만 명의 주택 소유자들이 주택을 잃었다. 이러한 수치 뒤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무분별한 베팅을 함으로써 은행을 위험에 몰아넣은 자들이 아닌, 서민들의 고통이 숨어있다. 나의 친척, 친지와 친구 중에도 일자리와 저축을 잃고, 사업이 황폐해진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내 앞에서 그런 티를 안내고 품위 있게 행동해도, 나는 그들의 눈과 목소리에서 "왜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했는가?"하는 메시지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잘못 했더라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는 핑계는 그들이 집세를 내거나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그 변명은 사실이었다.
미국의 실업률은 10%로 상승하였지만, 대공황 당시의 25%까지는 가지 않았고 2013년 말에는 7% 미만이었다. 우리의 회복은 과거 위기의 전형적이었던 시기보다 훨씬 빨리 시작되었으며, 회복세는 다른 선진국의 경우보다 훨씬 강했다. 2011년 우리의 국민총생산은 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일본이나 영국, 유로존의 산출량은 2014년에 가서야 그 수준을 회복한다. 우리는 과거 4년간 매월 민간 부문 일자리 순증가를 달성함으로써, 총실업자를 대공황 당시의 1년 신규 실업자 수준인 880만 수준으로 낮추었다. 주식시장이 과거 고점을 돌파함에 따라, 퇴직연금은 금융위기 당시 증발했던 5조 달러를 복구하였다.
p.62-63
걱정할 일은 많았다. 의회 지도자들은 당초에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대출 요청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명백히 발뺌하고 있었다. 우리는 의회가 도와주지 않을 경우에 멕시코를 단독으로 지원할 대책을 수립하는 중이었지만, 의회는 우리를 막으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멕시코를 지원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럴 경우 클린턴과 루빈에게 정치적 재앙일 뿐만 아니라, 장래의 위기 국면에서 미국이 개입할 여력을 상실시킬 것이었다.
이러한 걱정은 루빈장관의 것이기도 하였으나 그는 우리에게 항상 다섯 발짝 미리 움직이고, 우리의 가정을 다시 비판하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라고 요구하였다. 장관은 "걱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1년 동안, 나는 금융위기 와중에 걱정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것이라는 같은 말을 반복하여 듣게 되었다. 나는 걱정이 전략은 아니지만, 좋은 전략의 선결요건이라고 생각한다.
p.67-68
1995년 말이 되자 멕시코로 자본이 되돌아왔다. 1997년도에 경제생산량이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였고, 구제금융을 조기 상환함에 따라 미국은 14억 달러의 이자를 받았다. 멕시코가 안정되자 비교대상이던 남미, 아시아와 동유럽 시장들이 모두 상승하였고 구제금융은 주효하였다. 하지만 이때쯤 멕시코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고, 구제금융이 성공했음에도 우리가 투자금액에 이익까지 회수하였다는 사실이, 클린턴 대통령과 루빈 장관이 구제 결정과정에서 겪었던 정치적 타격에 대비해 주목받지 못하였다.
멕시코의 경우 위기 대응의 참혹한 정치적 역학에서 얻은 상쾌한 교훈이었다. 나는 그렇게도 논란거리였던 업무를 맡아본 적이 없었고, 공적 신인도의 정점에 서 있었던 루빈 장관과 그린스펀 의장이 내가 보기에 필연적이던 리스크를 안았다고 해서 모욕을 당하는 모습은 보기에 안타까웠다. 클린턴 대통령은 "멕시코 구제조치로 인해서 단임으로 끝날 수 있다."는 보좌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지원을 해준 반면, 대중들이 반발하자 발을 뺀 의회 지도자들의 대조적인 모습은 많은 교훈을 준다. 우리에게 구제금융 규모를 늘리라고 종용까지 하던 뉴욕주 공화당 소속, 상원 은행위원회의 위원장인 알폰소 다마토 의원이 가장 비판적으로 돌변하였다. 의회의 그러한 기회주의로 인해 우리가 약정을 준수할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손상을 받아, 멕시코의 신뢰를 회복하기가 더 어려웠다.
실제로 위기가 끝나자 다마토 의원은 장래의 위기 시에 정부가 환율안정기금을 사용하는 권한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가 또 발생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세계화로 인해 국가 간에 순식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핫머니가 거대 규모로 축적된 반면, 금융의 버블과 위기를 초래하는 인간심리의 한 부분들은 불변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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