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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종횡무진 역사(7)

by Diligejy 2015. 10. 3.

 


종횡무진 역사

저자
남경태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14-07-2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동양사와 서양사, 시사와 역사가 한눈에!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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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4~155

   균전제란 토지[田]를 국유화해 농민들에게 고르게[均] 나누어주고 수확물의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다. 따라서 균전제가 올바르게 기능하려면 무엇보다 토지의 총량이 확정되고 불변적이어야 한다. 제국이 건설된 초기에는 산수만 잘한다면 쉬운 일이었다. 전국의 토지 면적을 잘 계산해서 인구에 맞추어 배분하면 되다. 그러나 왕조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중기쯤 되면 변수가 많아지므로 그 계산이 복잡해진다. 산수보다 수학이 필요해지고, 수학보다 사회학이 필요해진다. 토지의 총량도 변할뿐더러 토지 소유관계를 둘러싼 사회 변동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미개간지가 개간되는 경우도 많고, 각 농민 가구의 변화에 따라 토지 경작자가 달라지는 사례도 많아진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미개간지가 개간되는 경우도 많고, 각 농민 가구의 변화에 따라 토지 경작자가 달라지는 사례도 많아진다. 흔한 예로, 집안의 손이 끊겨 경작할 장정이 없어진 가구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농토를 버리고 타향으로 떠난 가구도 있다. 모드 사정이 개국 초기와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지도 못했다. 사실 균전제는 제국이 존립하는 토대이기에 쉽게 바꿀 수도 없는 처지였다.

   문제는 본말의 전도에 있다. 국가의 골간은 땅과 사람이다. 이 사실은 문명이 탄생한 이래 오늘날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을수록 대국이고 강국이다(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 추가한다면, 역사가 건강할수록 강국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중국식 통일 제국에서는 그 명백한 사실이 전도된다. 땅과 사람이 국가를 이루는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 땅과 사람이 존재한다. 삶의 효율성과 편의를 도모하려는 게 제도의 본래 취지임에도 거꾸로 제도 자체가 존속하기 위해 삶이 희생되고 변질된다.

   중국식 제국에서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지배층의 도구로 국가가 필요할 따름이다. 사실 이 점은 동양의 국가가 탄생할 때부터 있었던 특징이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국민주권의 원칙에 입각한 근대 공화국이 탄생하기 이전의 왕조시대에도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었다. 반면 동양의 왕국은 언제나 왕이 단독 오너였다. 서양의 국가느 사람들이 생존과 안전을 위해 만들었으나 동양의 국가는 지배층이 민중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었다. 중국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 외부(하늘)에서 온 정복자 단군이 민족 시조라는 사실은 건국신화에서부터 지배/피지배의 계급적 관점이 당연시된다는 것을 말해준다(엄밀히 말해 우리 민족의 혈통적 조상은 단군이 아니라 단군의 지배를 받은 원주민이다). 그랬기에 동양식 국가는 늘 건국자/지배자로 시작되고 처음부터 국호와 도읍을 중시하는 것이다.

 

p.155~15

균전제의 기본 전제인 토지 국유의 개념은 힘을 잃고 토지는 사실상 지주들에 의해 사유화된다. 토지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확대 재생산된다. 당 제국의 실패를,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동양식 지배 체제의 근본적 실패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동양식 왕조에서는 늘 토지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단지 토지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근저에는 토지가 형식적으로는 국가나 왕의 소유이면서도 실제로는 사유화되는 모순이 있다.

이 모순이 중국보다 더 확연히 드러나는 사레는 한반도 사회의 경우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전시과田柴科라고 부른다. 토지의 주요 생산물인 식량[田]과 땔감[柴]에서 나온 용어인데, 명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시과가 고려시대 공무원(관리)에게 봉급을 주던 제도라는 점이다. 사기업이 없고 경제의 민간 부문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니

당시 공무원 봉급제도는 국가와 사회의 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왕이 관리를 임용했으면 봉급을 줘야 한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 급료를 지불하는 방식은 토지다. 그러나 이런 순경제적인 측면에도 정치 이데올로기가 개입된다.

유학 이념에 따르면, 천하의 주인은 군주다. 군주는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의 땅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소유하고 모든 백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이것을 왕토사상王土思想이라고 부르는데, 춘추전국시대의 문헌 <시경詩經>에 나오는 "溥天之下 莫非王土(넓은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라는 문구에서 비롯된 관념이다. 바로 이것이 동양식 왕조와 서양식 왕조의 큰 차이를 이룬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마 황제는 제국의 모든 것을 통째로 소유하지 못했다.. 군사 원정을 벌이려면 군대와 합의를 보아야 했고, 승리의 대가로 전리품을 약속해야 했다. 지휘과과 말단 병사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군단의 지휘관은 한 도시를 점령했을 경우 병사들에게 사흘동안 약탈할 기회를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오너가 아니었기에 병사들에게 직접 전리품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스스로 챙기게 한 것이다.

   왕국의 왕이 국가의 오너가 되지 못하는 것은 중세에도 마찬가지였다. 15세기 포르투갈

왕자 엔리케가 아프리카 서해안의 해로를 개척한 것은 정치적 명령이 아니라 수익을 노리고 자비를 들인 '투자'였다. 16세기 영국 왕자 엘리자베스 1세는 아프리카인들을 잡아 아메리카에 노예로 파는 사업에 '주주'로 참여해 수익을 나누어 받기로 하고 자기 소유의 선박을 제공했다. 17세기 영국 왕 찰스는 전쟁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의회와 충돌을 빚다가 서유럽 최초로 국왕이 참수를 당하는 전례를 남겼다.

   이 모든 사건이 동양식 왕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동양의 군주는 권위와 권력으로 원정군을 파견할 수 있었고, 국가 재산의 유일한 소유자이므로 전시에는 모든 물자를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었다. 원정의 대가를 병사들에게 약속한다거나 수익이 날 만한 곳에 국왕이 '투자'한다는 것은 동양의 군주로서는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고려의 전시과가 무너지는 과정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토지의 유일한 소유자가 왕이니까 토지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 넘겨주거나 양도할 수 없다(공신전처럼 가문에 세습되는 토지가 있었지만 이것도 근본적으로는 사유지가 아니라 국유지였다). 그러므로 고려 정부는 관리를 임용해도 급료로 토지 자체를 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급료는 줘야 한다. 땅은 줄 수 없는데 땅밖에 줄 게 없다. 어떻게 할까? 절묘한 해결책이 있다. '공무원'들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내주는 대신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를 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세를 받을 권리, 수조권收租權이다. 왕토사상의 이념과 현실적 필요성을 조화시킨 절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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