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한국소설

설계자들

by Diligejy 2019. 9. 2.
설계자들
국내도서
저자 : 김언수
출판 : 문학동네 2010.08.20
상세보기

p.41~42

터무니없는 삶이다. 아킬레우스는 쓸데없는 곳에 갑옷을 걸치지 말고 유일하고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왼쪽 뒤꿈치에 튼튼한 갑옷을 걸쳐야 했다. 래생은 아킬레우스가 그 작은 약점을 가리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약이 올랐고 그것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래생은 내내 울었다. 자신이 읽어야 할 혹은 읽을지도 모를 도서관의 이 광대한 책의 페이지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페이지들 속에서 영웅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소녀들이, 역경과 좌절을 뚫고 삶의 목표를 이룬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유일하고 작은 약점을 가리지 못해 얼간이의 화살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 래생은 이 신뢰할 수 없는 삶이 놀라웠다. 그가 어떤 자리에 오르건, 불사의 몸을 가지건, 위대한 무엇을 움켜쥐건 그것은 한순간의 작은 실수로 사라질 수 있었다.

그 순간 삶에 대한 엄청난 불신이 래생의 몸을 밀치고 들어왔다. 언젠가 나는 여기저기에 수없이 깔려 있는 불행의 덫들에 걸려버리고 말 것이다.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불행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떨어지지 않는 끈질기고 집요한 공포가, 언젠가 내 말랑말랑한 삶을 덮칠 것이다. 래생은 자신이 애써 부여잡고 있던 모든 것들이 어느 한순간에 싱겁게 무너져버릴 거라는 이상하고도 기묘한 느낌에 빠졌다.

p.350

맞는 말이다. 누구나 사연이 있다. 너구리 영감도, 추도, 털보도, 미토도, 이발사도 그리고 심지어 한자도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으로 분노를 키우고, 서로를 증오하고, 또 서로를 죽인다. 모두들 자기 사연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자신의 상처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할까?

p.394

"사람들은 나 같은 악인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악인은 지옥 같은 데 가지 않아. 여기가 바로 지옥이니까. 마음속에 한 점의 빛도 없이 매순간을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게 지옥이지. 언제 표적이 될까, 언제 자객이 올까, 내내 두려움에 떨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살고 있는 게 바로 지옥이지."

'문학 > 한국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슨 말 하는진 알겠는데 - 빛의 과거  (0) 2020.07.30
달 너머로 달리는 말  (0) 2020.07.14
내게 무해한 사람  (0) 2019.03.17
회색인간  (0) 2018.04.10
비행운  (0) 2018.03.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