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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글/자기발견

예민한 이유

by Diligejy 2020. 2. 29.

나는 고시원에 산다.

화장실 공유를 극혐하는지라 개별화장실이 있는 방이지만, 그래도 고시원은 그닥 살기좋은 환경이 아니다.

이따금씩 풍겨오는 담배냄새와 키득거리는 소리,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이곳은 고시원이구나 라는 걸 깨달으면서 아침과 저녁을 맞는다. 근무를 마치고 방에 겨우 들어오면 좁디좁은 방에 누워 유투브를 본다. 가끔 고시원에서 라면을 먹으면 현타오지게 오는 날도 많이 있다. 라면을 먹는데 담배냄새까지 맡으면 진짜 현타오진다.

라면 먹는데 담배냄새에 근처방에서 떠드는 소리 들리면 차라리 다시 회사에 가고 싶다. 

인터넷 속도 빠르지, 듀얼 모니터 있지, 걍 혼자 있지, 맘대로 음악 틀어도 되지. 차라리 방보다 낫다.

고시원에서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없고 인사하는 경우도 드물어 마주침이 어색하다. 그래서 왠만하면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언젠가 쪽방촌이 밀집되어 있어 위험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쪽방촌...

쪽방촌 하니까 뭔가 나와 관계없는 최하위계층의 사람들이야기 같이 보였다. 
그런데 내 얘기였다. 쪽방촌이라는 말대신 고시원... 이렇게 넣으면 내 얘기니까.

그제야 느꼈다. 나는 위험한 곳에 사는구나.

어렸을 적 외가에서 자랐다. 누구나 그렇지만 어렸을 적에 사회적 계층이란 걸 느끼지 못하고 구멍가게 하시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사랑받고 가게에 있는 과자, 아이스크림 냠냠하다가 장사 다 말아먹는다며 혼나는 그런 일상이 기뻤다. 걱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언젠가 깨달았다. 내가 달동네에 살고 있었다는 걸.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슬프다 화난다는 감정보다는 그냥 멍해졌었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취직하고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서 조금씩 잊었는데 나는 '쪽방촌'에 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번 코로나 사태에 나는 굉장히 예민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다. "정부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신가요?"

그 질문을 들은 순간 어떻게 답해야할 지 고민했다. '정부'란 무엇인가. 매일같이 TV에 나오는 정은경 본부장도 '정부'기관의 직원이고, 방역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공무원들도 '정부'기관의 직원이고, 출퇴근하며 보는 동사무소는 '정부'기관인데 나는 어디에 불만이 있는걸까. 왜 불만이 생긴걸까. 선동당한걸까.

늘 고생하시는 '정부'직원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관련 프로젝트도 하고 있는데 나는 어디에 불만이 있는걸까. 왜 불만이 있는걸까.

본능이었다. 기사가 나오기 전부터 나는 내가 위험한 환경에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랬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동물로서 본능이 먼저 발동되었다. 그랬기에 뉴스에서 나오는 데이터들이 나와 무관한 노이즈 데이터가 아니라 시그널로 보였다. 그리고 그 시그널들을 보았을 때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뉴스에 나오는 본부장을 향한 비판이 아니었다. 그 분은 실무진이니까.

503을 겪으며 이미 배웠다. 의사결정은 위에서 하고 위에서 사고친 걸 수습하는 게 실무진의 몫이라는거. 영광은 위로 모욕은 아래라는 거. 그리고 위에서 헛발질한다 싶으면 각자도생해야한다는 것도 배웠다.

입이 심심하면 가끔 1400원짜리 비요뜨를 먹는걸 좋아한다.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어느날 입이 심심해 비요뜨를 사러 마트에 갔는데 계란과 두부 라면이 다 사라진걸 보았다. 그런 뒤 며칠 후 구청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며 문자가 왔다. 역시 미스터 마켓은 무섭다.  

생필품을 많이 구매해 비축해두고 싶었다. 하지만 좁디좁은 고시원에 그럴만한 공간은 없었다. 

어떤 어른들이 그랬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거 아니라고. 그런데 머리에 피도 안마른 내가 본 세상을 관찰해보니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불행하지 않을 확률은 높은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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