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5
디에고 벨라스케스, <아라크네의 신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1657년경
p.56
기존의 예술철학이나 기술철학이 아닌 '기예의 철학'은 이 과제의 고통을 음미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몽테뉴가 그랬던가. "다른 곳을 사유하자"라고. 철학이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라 '아는 자의 방황'일 때 의미가 있음을 역설한 푸코의 말도 상기해두자. 몽상가의 철학이라고 조롱받더라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어리석은 시도를 해보자. 언제 철학이 몽상 없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p.59
파올로 데 마테이스, <헤라클레스의 선택>, 영국 애슈몰린 미술관 소장, 1712년
곤봉과 사자가죽, 황금 사과를 들고 있는 헤라클레스 금동상, 로마 바티칸 박물관의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 소장
p,75
시간은 모든 일이 한꺼번에 발생하는 사태를 막아주는 것이다
- 존 아치볼드 휠러
p.78
조르조 바사리 & 게라르디 크리스토파노, <크로노스에 의해 거세당하는 우라노스>, 피렌체 베키오 궁전 소장, 1560년
p.78~79
신의 이름과 시간을 뜻하는 명사가 동일하게 발음됨으로써 중첩된 의미로 사용된 기원은 '언어 연상'을 즐긴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p.79
크로노스-사투르누스를 시간의 신으로 묘사하는 회화의 공식이 생겨난 것은 주로 중세 초기에 활동한 백과사전 저술가와 문법학자들 때문이었다.
p.80~81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는 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고 설명해야 한다면 나는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p.85~86
질서의 상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가려는 보편적 경향은 시간이 방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우주가 그 시작에 어떻게 질서 상태일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답할 수 있을 때에만 만족스럽게 작동한다. 우주는 매우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무질서 상태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 큰 무질서를 향한 점진적인 경향은 없었을 것이고, 시간의 방향성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방향을 설명하는 것은 우주의 시원에 존재했던 거대한 조직화를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현대물리학은 시간의 성격을 우주의 기원 바로 그 시점까지 추적한다. 시간에 대한 물음은 우리를 근원적인 자연법칙에 대한 물음에 이르게 한다.
p.92
잘 말해진 이야기는 특정한 인물의 삶을 표현하더라도 인간 조건과 세계 구성의 보편적 측면을 드러낼 수 있다. 이는 자연법칙을 추상적 수식(數式)으로 표현하는 과학적 직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통찰을 제공한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그 본질을 파악하기 힘든 시간은 매개체를 통해 이런 매개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허구적 경험'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역설적임에도 과감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p.95
시간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다.
p.95
크로노스의 의도는 시간의 흐름을 가속하겠다는 것도 시간의 흐름을 저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의도는 '사건'을 만들지 않겠다는 데 있다. 사건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이룬다. 크로노스는 사건을 일으켜 이야기를 이루어갈 수 있는 서사의 새로운 주체를 집어삼킨 것이다.
p.98
권력을 가진 자가 세대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오래 살기 위함이 아니다(오래 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들이 많다).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싶기 때문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도록 하기 위함이다.
p.98~99
하랄트 바인리히는 시간의 특성은 항상 '빠듯함'에 있다고 했다. 자연적 시간은 항상 '빠듯'하지만, 서사적 시간은 언제나 '느긋'하다. 크로노스는 서사 권력에의 의지를 극단적으로 표출하지만, 제우스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야기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한다. 곧 자신의 자식들에게 서사적 거세를 행하지 않고, 서사 권력을 나누어줌으로써 서사 취향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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