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2
플라톤은 여러 가지 논리를 개발해서 자신의 주장에 충분한 논증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참으로 엉뚱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을지'는 몰라도 '터무니없는'발상은 아니었다. '뜻밖'이었을 뿐 '근거 없는'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지난 2천 5백 년 동안 철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을 포함한 서양의 거의 모든 학문에 영향을 끼쳤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보통 사람은 위대한 철인과 달리, 엉뚱한 발상을 충분한 논증을 거쳐 거대한 철학 체계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엉뚱한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 의혹의 미끼를 뛰어난 사상가들이 물어주기를 기대하면서......
p.110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이 갖는 모든 관심은 세 가지 물음으로 집약된다고 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내가 무엇을 바라도 되는가? 그리고 만년에 출판된 <논리학>을 위한 서문에서 앞의 물음에
'네 번째 물음'을 첨가했다. 그것은 길고 긴 연구 생활의 끝에 노학자가 한 말이어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칸트의 네 번째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그의 앞의 세 질문은 모두 네 번째 질문에 귀결된다고 했다.
p.112
이제 칸트의 네 번째 질문은 더 이상 최종 질문이 아니다.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질문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때가 왔다. '인간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이것이 다섯 번째 질문일 것이다. 아니 변화의 과정에 좀 더 충실하려면, '인간은 무엇이 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인간만은 진화의 종점에 도달해 있다고 믿고 싶은 현재의 인간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플라톤이 불멸하는 영혼을 추구했던 것보다 더 엉뚱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p.113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평가로 회복되고, 미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측으로 소환된다.
p.126~127
미노타우로스와 미궁 그리고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실은 서구 의식의 뿌리 깊은 변증적 갈등을 반영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피지스(physis)와 노모스(nomos)의 관계와 갈등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변이와 기형을 제공할지 모른다. 우리는 자연의 욕구를 알지 못한다. 자연의 선택도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동일성을 위한 인간의 의지는 종종 자연스러움 또는 '자연적 정상(正常)'을 도덕적 이상(異常)으로 판단하고, 그것이 윤리적 정상으로 수정될 것을 요구하고 단호히 실행한다. 윤리적 정상화는 생명의 기운을 억압할 수 있다. 그 단호함에는 생명체의 제거도 포함될 수 있다. 영웅의 여정은 '살생'의 여정이었다.
p.127
미노타우로스의 탄생은 하나의 온전한 개체의 탄생이다. 그는 개체들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리는 개체이다. 그 개체는 인간의 동일화 욕구에 슬픈 눈망울로 차이와 다양성의 신호를 보낸다. 그는 혼돈처럼 보이는 미궁의 중심에 생명이 있다고 알린다. 카오스에서 세상이 탄생했다는 메타포는 혼돈이 생명의 근원임을 말해준다. 그 혼돈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을 가능성 또한 전제된다.
p.128
조지 프레드릭 와츠, <미노타우로스>,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1885년
출처 : http://blog.ohmynews.com/feminif/354634
p.129
공상과학의 수준으로까지 생각을 넓히지 않더라도, 별난 개체들의 미래에 대한 물음은 생명체의 공존 능력에 관한 물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생명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며, 그것이 곧 존재론적인 것이다. 이는 '있음은 있다'라는 동일성 논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을 수 있음이 곧 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p.149~150
수많은 미디어는 인간이 자신을 확장한 것이다. 우리 자신을 기술적인 형태로 확장한 것들을 보고, 사용하고, 지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확장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확장물을 개인적인 체계 속에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매클루언은 나르키소스 이야기의 은유를 이렇게 본 것이다.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확장'이 인간 자신을 마비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p.150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 소장, 1903년
출처 :http://pksmystory.com.ne.kr/05_myth1/Echo_Narcissu.htm
p.152
나는 현대의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극단의 에고이스트들을 본다. 호수와 나르키소스에게는 '자기만' 존재했던 것이다. 그 외의 모든 존재는 배제되었던 것이다. 타자는 나를 비춰주는 매체로서만 가치가 있고 존재 이유가 있었다. 더구나 이 지독한 자기애는 타자를 거침없이 이용하고 타자의 존재도 자아에 귀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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