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73
역사학자들은 지난 160년간 일본의 역사를 2번의 성공과 2번의 실패로 본다. 1854년 개항부터 제2차세계대전까지 90여 년은 일본의 첫째 성공과 실패 기간이다. 제2차세계대전 후부터 1989년까지는 2차 성공기, 1990년부터 현재까지를 2차 실패기로 나눈다.
p.274
필자는 이 참근교대 제도를 일본 고성장의 사회적 기반으로 평가한다. 각자 연 1만 석 이상의 쌀을 생산하는 대규모 지주(地主)였던 다이묘들이 일정 기간 에도에 머물면서 많은 인원과 물자가 이동했다. 그들이 소비할 물품을 모두 가져오기에는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땅덩어리가 3배나 크다. 물물교환으로 수요를 모두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화폐제도가 발달했다. 에도에 머무는 다이묘는 무려 26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화폐를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상업혁명이 발생할 수 있었다.
p.275~276
1853년 흑선(黑船)이라 불리는 전함 4척을 이끈 미국의 페리(M.C Perry) 제독에 의해 일본은 서구에 개항되었다. 1854년 미-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서구 문물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일본 사회는 막부 중심의 봉건제가 급속히 해체되었고, 이후 근대국가로 도약한다. 특히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을 통해 권력이 막부에서 왕에게 이전되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표면적으로는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실상은 강력한 천황 중심 국가로의 전환이었다. 이를 통해 단일 리더십을 확보했다. 왕권으로의 복귀는 정치발전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다만 구체제였던 막부체제를 붕괴시키면서 근대적 제도 정비를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근대적 통일국가가 되었다. 토지제도, 학제, 징병제 등을 국가 주도로 실행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이전 400여 년간 지속된 상업혁명과 산업혁명의 기반 위에서 자본주의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은 아편전쟁(1840년) 이후 서구의 빈번한 침략에 대해 쇄국정책으로 맞서는 수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청 왕조의 쇠퇴와 더불어 태평천국의 난(1851년) 같은 체제 변혁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즉 중국과 한국이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외세에 저항하던 시기에 일본은 30년의 시간을 먼저 획득해 강력한 근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p.276~278
근대화된 일본은 조선 침략(1876년),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을 통해 서구형 근대국가로 빠른 성장을 보인다. 대외 침략의 배경에는 제국주의적 정치 이념뿐 아니라 빠른 산업화에 따른 공급과잉 경제를 돌파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차 산업화가 19세기 후반 마무리되면서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크게 하락했다. 과잉생산된 공산품의 소비처가 필요했는데, 그 돌파구가 대외 침략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반 일본경제는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리는 등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 시기에 금융,방적, 제분, 비료, 석유 등 다양한 산업에서 카르텔이 형성되고 재벌기업이 탄생한다.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 3대 재벌이 이떄 탄생했다.
공급과잉 상태의 일본에게 제1차세계대전(1914~1918년)은 도약의 발판이 된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생산시설은 모두 파괴되었다. 전쟁 지역에서 빗겨간 미국과 일본의 생산시설만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을 중심으로 수출을 늘리면서 이른바 '광란의 20년대'라는 대호황을 맞게 된다. 일본도 유럽 이외 지역인 중국, 인도 등 아시아와 중동까지 수출을 늘리면서 미국과 유사한 호황을 누린다. 당시 일본의 수출은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 비해 3배나 늘었고, 광공업 생산 또한 5배나 증가했다.
이런 경제적 풍요를 기반으로 일본에서는 일시적으로 민주주의 욕구가 확산된다. 흔히 얘기하는 다이쇼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기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부터 다이쇼 국왕이 제거된 1926년까지를 의미한다. 이때는 러시아혁명, 국제노동기구 설립 등의 영향으로 민중의 자각이 높아지는 시점이었다. 노동자, 농민 조직이 급속하게 확산되기도 했다. 보통선거 운동이 활발했고 군비축소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정당이 출현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직후 외부요인(군수물자 수출, 전후 복구사업)에 따른 과잉성장과 국내적 혼란을 적절히 관리하지 못하면서 미국의 전철을 밟아 일본도 대공황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1930년대로 넘어오자 일본도 대공황의 중심권에 도달했다. 1854년 개항 이후 대공황까지 76년간 이어진 일본의 고속성장은 막을 내렸다. 경제가 급속히 냉각되자 군국주의가 민주주의를 대체하게 된다. 이후 군국주의의 팽창 본능과 대공황이 결합되면서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을 시작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돌입한다. 이를 지금의 논리로 해석하면 중진국 함정에 빠진 일본이 체제 정비보다는 대륙침략 같은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으로 국면전환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주사변을 출발로 제2차세계대전 패전까지 15년간 전쟁을 치른 일본은 첫 번째 실패를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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