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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김영하 - 퀴즈쇼 (1)

by Diligejy 2015. 11. 9.

p.18

어째서 환상은 현실보다 더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히는가. 스크린 속 표독스런 배우 최인숙의 가짜 죽음은 머리가 하얗게 센 고집쟁이 외할머니의 진짜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p.28

여자를 달래는 것은 권투에서 잽을 먹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해서 언제 상대방을 다운시키나 싶지만 계속 하다보면 꽤 효과가 있다. 잽이 안 통한다고 갑자기 강력한 펀치를 날려서는 안 된다. 그럼 모든게 파장이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p.32

나이 스물일곱의 멀쩡한 남자가 이럴 때 전화 한통 받아줄 친구가, 나와서 소주 한잔 같이 하자고 편하게 얘기할 친구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게 과연 정상일까?

 

p.55

"우선 생각을 하는게 중요하거든. 그리고 틀리더라도 일단 자기 답을 준비해둬야 하는거야."

 

p.55

"세상은 질문하는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원하지."

 

p.64

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 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

 

p.65

정말 불운은 다양한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서 인간의 예지력으로는 그것이 다가온다는 것을 감지하기 어려운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불운, 즉 불우한 운명이다.

 

p.67

우리는 책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책이 우리를 보는 건지도 몰라. 책이 인간을 숙주로 삼아 잠시 머물다가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나는 것일지도.

 

p.79

"레스토랑에는 원래 좋은 자리라는 게 많지가 않아. 좋은 게 흔할 리 없잖아?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손님들이 자리에 불만을 갖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 손님들이 자리를 고르면 말이야. 결국 그 자리에 앉자고 주장한 사람이 그 원망을 뒤집어쓰게 되는 거야. 그러나 레스토랑 측에서 정해서 앉혀주면 적어도 자기들끼리 자리 가지고 원망하지는 않아. 원망을 하더라도 레스토랑 쪽을 비난하겠지. 그리고 말이야. 의외로 선택을 내리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더라구. 차라리 누가 대신 정해줬으면 하고 바란단 말이야. 그러니까, 들어오는 손님보고 아무 데나 편한 데 앉으라고 하는 건 친절이 아니라 불친절인 거야.

그런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권위 있는 지배인이 자리를 정해서 앉혀주는 거야. 권위적인 명령도 때로는 친절인 거지."

 

p.81

어떤 질문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퀴즈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질문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94

내 인생에도 그런 예기치 않은 사랑(my unintended)이 있을까? 이런 나를 구원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혹시 벌써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건 아닐까?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처럼 이제는 세상의 엄혹한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 된 것은 아닐까?

 

p.96~97

사랑이 운명이라고 믿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운명이란 맞힐 수밖에 없는 답을 결국 맞히는 것이다. 사랑해야 할 연인들에게는 맞힐 수밖에 없는 답이 즐비하다. 신화 속에는 깨진 거울이 서로 만나 온전한 거울이 되는 얘기들이 나온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주몽은 끝내 고구려의 왕이 된다. 운명은 누구 말마따나 과녁에 명중하도록 쏘아진 화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백 퍼센트 명중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 이미 만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들의 만남을 운명으로 믿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단 한개의 단서도 치명적이며, 단 한조각의 유류품도 무서운 확신이 된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무능력한 탐정, 서툰 수사관이다. 그들은 법정에서는 채택도 하지 않을 어수룩한 증거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신념에 도달한다. 누구도 그 신념을 철회시킬 수 없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신념, 그것은 운명에 대한 확신이다.

 

이 서툰 탐정의 눈에, 운명적 사랑이라는 사건의 전모는 이미 명백하며 범인의 검거는 식은 죽 먹기다. 화살은 이미 표적에 꽂혀 있고 표적으로 걸어가 십 점 만점의 정중앙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뽑아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화살을 뽑아든 우리의 영웅은 이렇게 외치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운명적 사랑이라고.

 

p.98~99

연정(戀情)을 완성하는 것은 비밀이다. 연정과 비밀은 된장과 미생물의 관계와 같다. 비밀이라는 균은 연정을 발효시킨다. 비밀이 발효시킨 연정은 서서히 냄새를 풍기며 익어간다. 아슬아슬하다. 비밀이 너무 과하면 연정은 부패되고 그리하여 끝내는 악취를 풍긴다.

그때쯤 되면 모두가 그것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그러나 적당하기만 하다면 연애를 신비롭고 짜릿하게 만들어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결혼은 연애의 결말이라기보다 전혀 다른 어떤 것일 가능성이 크다. 결혼은 연애에서 비밀이라는 위험요소를 제거한 무균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p.102~103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치 오래전에 빌려주고 잊어버린 돈을 돌려받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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