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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by Diligejy 2016. 6. 19.

p.41

함부로 요약하지 마라.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


p.52~53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이저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p.63~64

먼저 고백해야만 한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내 눈물을 믿지 않는다고.

내 진실을 믿지 않는다고.

내 기억을, 고통을 믿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는 순간, 모든 것이 허깨비가 되는 순간, 세계 전체가 하나의 얇은 껍데기, 계란 흰자를 싸고 있는 하얗고 불투명한 막(膜)같은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 나는 믿지 않는다. 믿어지지 않는다. 어떤 의미도. 어떤 진실도. 어떤 투명함도. 당신마저도. 그렇다. 덜덜 떨리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고백해야만 한다. 당신의 존재마저도, 당신이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p.64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득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p.67

모든 것이 수축되는 한 점에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가 된 그 점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죽은 적도 태어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p.70

아마 물고기는 물이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도 허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허공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아. 바람이 불고, 벼락이 치고, 강한 압력으로 우리 몸을 누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 더 높은 차원의 눈으로 우주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거야.


p.86

어떤 분노는 이렇게 지속된다. 혼란과 무력감, 고통을 연료로 밑불처럼 낮게 탄다. 머리를 뜨겁게 하지 않고,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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