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
영화와 사귀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귐은 영화를 작품(work)이 아닌 텍스트(text)로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롤랑 바르트는 작품과 텍스트를 구분했다. 작품에서는 오직 작가의 뜻을 읽어낼 뿐이지만, 텍스트에서는 우리가 뜻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작품은 닫혀 있으나 텍스트는 열려 있다. 작품은 때로 고통을 안기지만 텍스트는 언제나 즐거움을 준다.
p.17~19
트루먼에게 일어난 일이 당신과 나,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면 믿겠는가. 어떤 영적인 존재들, 가령 귀신, 조물주, 신과 같은 절대자의 눈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트루먼과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눈은 우리가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본 것처럼 죽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또한 첫 걸음마의 순간뿐 아니라 우리가 내딛는 모든 발자국들을, 첫 거짓말뿐 아니라 모든 거짓말을, 첫 키스뿐 아니라 모든 동작들의 목격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별 수 없이 시헤이븐에 갇혀 있는 또다른 트루먼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운명에 대한 경고는 늘 전해져 왔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지켜보신다. 함부로 거짓말하지 말고 부끄러운 행동 하지 말라", "비밀은 없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등등
이런 것들은 유용한 충고들이다. 그러나 트루먼처럼 출구가 있고 바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충고의 의미는 달라진다. "신이 지켜보는 눈길 앞에 떳떳하라"는 것은 "몰래 카메라 앞에서 조신하라"는 경고와 다를 바 없다.
정말 신의 눈길이라는 카메라가 있다면 누구도 허튼짓 않고 불경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행동을 낱낱이 붙잡아내는 전지전능한 신의 눈앞에서 누가 감히 거짓말을 하고 훔치고 죽이겠는가. 이렇게 되면 우리가 정직하게 말하고 떳떳하게 처신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경우에, 우리의 삶이 카메라에 붙잡힌 트루먼의 운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는 데 있다.
영화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우리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양심, 원죄 의식 같은 것은 영화에서 크리스토프가 트루먼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조물주가 인간에게 조작해 낸 사건의 부산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트루먼이 자신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죽음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거나 물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인간은 신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평생 교회나 사원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맴돌다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생애는 과거의 짐과 미래의 꿈 사이에 걸쳐진 짧은 밧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 밧줄은 참회, 반성, 기도, 눈물 등으로 엮일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이 밧줄을 타는 것, 즉 죄책감 속에서 회개하고 뉘우치고 반성하며 위태롭게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모험의 연속에 지나지 않으리라.
감독 피터 위어는 <트루먼 쇼>에서 다른 비전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선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헤이븐' 바깥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 바깥으로 탈출함으로써 감시의 시선, 투시의 카메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물음은 "어떻게 카메라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떳떳해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카메라 바깥으로 나서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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