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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쟁사

이라크 전쟁

by Diligejy 2022. 9. 22.

p.30

이라크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한 소재다. 

 

첫째,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이라크 전쟁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했고, 따라서 미국의 상대적 힘의 약화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국제정치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선택에 의한 이라크 전쟁'보다 '필요에 따른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부시 행정부는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선택으로 침공했던 이라크'의 상황을 안정화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계속 실패만을 거듭했고, 이라크에 투입된 경제적 군사적 자원은 별다른 효과도 내지 못한 채 낭비되었다. 그런 반면에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따라서 미국의 행동과 그에 따른 국제정치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이라크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더 중요하다.

 

p.31

이라크 전쟁을 이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의 동맹국인 미국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2010년 8월에 전투 병력을 철수할 때까지 7년 동안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군사력 구조를 상당 부분 바꾸었으며, 그에 따라 주한 미군의 병력 구조도 변화했다. 기존에 배치되었던 전투 병력이 이라크로 이동 배치되었고, 동시에 군사 혁신에 기초하여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무기 체계의 개발과 그것을 사용하는 새로운 부대의 창설 등도 늦춰졌다. 예를 들어 미 공군은 F-22 등 '최첨담 무기'를 더는 구매하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주한 미군의 지상력 병력을 차출해 이라크에 배치했따. 즉, 한국으로서는 동맹국인 미국의 군사력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따라서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 특히 이라크 전쟁처럼 미국이 오랫동안 수행하는 전쟁은 미국의 군사력 구조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더욱더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p.33

미국은 '전쟁의 미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미래의 전쟁'을 전망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1990/91년 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냉전 기간 자신이 잘 준비했던 '전쟁의 미래'에서 성공했고 자신이 익숙한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정치적 차워에서 결정되는 '미래의 전쟁'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승리 자체는 미국에게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2003년 침공 과정에서도 동일한 역동성이 작용했다. 군사적으로 성공하면서 미국은 정치적 차원과는 무관한 '전쟁의 미래'에서 승리의 순간을 만끽했다. 침공 과정에서 미국이 동원한 군사력과 군사기술은 탁월했고, 이라크 정부는 침공군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이라크의 군사력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붕괴했고, 바그다드는 전투 개시 20일이 지나자 함락되었으며, 후세인 정권은 소멸했다. 하지만 미국은 침공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군사력이 지닌 파괴력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이라크를 점령한 다음에 발생할 다양한 문제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미래의 전쟁에 대해 냉정하게 예측하기보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기초해 전략을 구상했다. 점령이 시작되면서 이라크 전쟁은 부시 행정부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미국이 동원했던 첨단 군사력은 그 강력한 파괴력으로 말미암아 이후 '사태'에서는 오히려 부작용만을 일으켰다. 

 

p.49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기본적으로 시아파의 혁명이었다. 이슬람 세계 전체에서 시아파는 소수 종파다. 이슬람교도의 90%는 수니파이며, 10% 정도 정도가 시아파다. 하지만 시아파는 중동 지역의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란 인구의 90% 이상, 이라크 인구의 65% 정도가 시아파다. 이 때문에 중동 지역의 수니파 국가들은 '시아파의 위협'을 두려워했으며, 후세인의 수니파 소수 정권이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이라크를 통치하고 다른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전쟁을 수행하자 이를 지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400억 달러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 이전에는 외환보유고가 350억 달러였던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550억 달러 어치의 무기를 수입했고, 전쟁이 종식되는 시점에 GDP는 38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이라크는 자신의 경제 규모만큼의 외채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빚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이라크와 수니파 국가를 대표해 시아파 이란과 전쟁을 했고, 따라서 그러한 희생을 감안해 채무가 탕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채권국들은 이라크에 대한 채권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갈등은 결국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 전쟁으로 이어졌다.

 

p.56

흥미로운 것은 이라크 방공부대의 효율성으로, 소련에서 도입한 최신식 대공미사일 시스템은 연합군 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걸프 전쟁에서 연합군 공군은 43대의 항공기를 대공 포화로 상실했으나,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 방공부대는 미군 폭격기 2000여 대를 격추했다. 이처럼 이라크의 군사력이 비효율적이었던 것은 이라크 군사력이 정권에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세인이 개입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정치적 신뢰도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군대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p.64~65

미국이 직면한 위협이 중국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은 이 시기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어떤 강대국이든 새롭게 부상하는 경우에 기존 세력균형 상태에서의 안정성이 저해되고 전쟁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따라서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중국의 힘을 강화하는 경제 교류와 투자를 줄이고 일본이나 한국 등 동아시아 동맹국의 군사력 증강을 촉구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 한편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이 줄어든다면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 등의 방식으로 서로 협력할 것이며, 미국은 역외균형자(offshore balancer)로서 힘을 비축하고 문제 발생 시 최후의 순간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에 미국과 중국의 위기로 비화되었다. 2001년 4월 1일에 남중국해의 공해 상공인 하이난섬 남동쪽 약 100킬로미터 부근에서 미국 전자전 정찰기 EP-3가 정찰 도중 이를 감시하기 위해 출동한 중국 전투기 J-8과 충돌했다. 이 사고로 중국 전투기가 추락하면서 조종사가 사망했으며, 미국 정찰기는 하이난섬에 불시착했다. 승무원 24명은 중국 당국에 억류되었고, 정찰기 기체는 중국 정부가 '불법 입국에 대한 조사'를 목적으로 압류했다. 승무원 석방을 위한 협상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중국 주재 미국 대사가 중국 외교부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은 중국 전투기 조종사가 사망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며, 중국 영토에 착륙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설명 없이 영공을 침범해 '매우 유감'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사고가 난 지 열흘 정도 지난 4월 11일에 정찰기 승무원들은 석방되었으며, 기체는 중국 당국이 분해하여 모든 부품을 미국에 전달하는 형태로 반환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 많은 사람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새로운 냉전New Cold War'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으며, 이러한 사건이 축적되면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 같은 대립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새로운 냉전에서 중요한 의제는 대만 문제였을 것이며, 이러한 세계에서 국제정치는 냉전 초기와 유사한 형태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다만 미국괒 우국 사이에 존재하는 높은 경제적 상호의존(economic interdependence)은 미국과 중국 관계가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제동장치로 작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2001년 9월 11일 아침, 그러한 가능성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나타났다.

 

p.68

9 11 테러 직후에 빈라덴은 자신이 테러 공격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2004년 11월에는 자신이 공격을 지시했다고 명시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은 빈라덴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적인 거짓말일 수 있으며,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측면에서 많은 문제가 있다. 공격에 대한 미국 측의 공식 보고서를 작성한 9.11위원회는 2004년에 공개한 최종 보고서에서, 9.11 테러 공격에 가담한 하이재커는 모두 알카에다 구성원이며, 빈라덴의 지시를 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보고서에서는 알카에다 지휘부가 9.11 공격으로 구체화되는 테러 계획을 1999년 4월에 승인했으며, 빈라덴 자신이 직접 공격에 참여할 사람을 선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을 증명할 명확한, 또는 법정에서 사용될 수 있을 정도의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으며, 단순한 첩보 또는 정보 수준의 증거만이 있었다. 영국 정부 관계자들도 그러한 증거가 빈라덴이 테러 공격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보여주지만 기소하기에 충분하지는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p.97~98

'전투'에서 미국은 완벽하게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의 목적인 이라크 대량살상무기는 그때부터 찾아야 했으며, 이라크 민주화 또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2003년 5월부터 시작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부시는 너무나도 빨리 '임무 완수'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그브함에 더해, 전략의 부재와 준비 부족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후세인 정권이 사라지자 이라크인은 수도 바그다드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도시를 점령한 미군은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미리 명령을 받거나 준비를 갖추지 않은 상태였던 탓에, 이를 방관했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 정부의 행정시설과 기반시설이 파괴되었고, 국가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행정 데이터가 소실되었다. 하지만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자유는 본래 어지럽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사태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미국은 미국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힘을 풀어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부시 행정부는 낙관론을 버리지 못했고, 계속해서 이라크 사태를 악화시켰다.

 

p.120

이라크 정치에서 군대가 가진 상징성은 매우 컸다. 따라서 이라크 군대를 해산하는 행동은 이라크 자체를 해산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조치를 입안했던 네오콘과 브리머는 2003년 5월, 이라크 군대는 이미 소멸되었다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주장은 사실이다. 하지만 소멸되어 버린 군사력은 이라크 정규군이며, 공화국수비대 등은 조직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가너는 이라크 정규군 세력과 접촉하여, 기존 조직을 유지하면서 이라크군 병력을 이용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임시행정청의 일방적인 조치로 이라크 병력이 완전히 해산되었고, 병사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휴대하고 사라졌으며, 이라크 저항 세력은 바로 이러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연합군임시행정청은 이라크군을 해체함으로써, 저항 세력에 병력과 무기를 공급했던 것이다.

 

p.139~140

이라크에 뛰어난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함으로써 이라크인의 지지를 확보한다는 연합군임시행정청의 원대한 포부는 실패했고, 이른바 '게릴라 전쟁'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연합군임시행정청이 '완벽한 무능 Cannot Produce Anything'을 줄인 말이라는 농담이 떠돌았다. 무엇보다 연합군임시행정청에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조직이 필요로 하는 인력 가운데 3분의 1은 채워지지 않았으며, 배치된 인력도 평균 90일 정도만 근무하고 떠났다. 2004년 6월 연합군임시행정청이 해체되는 시점에 연합군임시행정청 직원은 119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2003년 4월부터 14개월 전 기간 근무했던 사람은 7명에 지나지 않았다. 연합군임시행정청 직원들은 대부분 자신이 맡은 분야에 경험이 전혀 없었다. 예컨대 테니스 선수 출신의 직원이 이라크 안보 문제를 다루고, 이라크 주식시장 문제는 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24세 공화당원이 담당하기도 했다. 연합군임시행정청에 근무했다는 것이 꽤 중요한 경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공화당원에게 자리를 나누어주었다. 연합군임시행정청 근무자를 선발하는 면접에서는 공공연하게 지원자의 지지 정당을 물어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근무자들은 연합군임시행정청에 3개월 정도 짧은 기간만 머물며 이력서를 장식하고 나서 좀 더 나은 직장이나 법학 또는 경영학 전문대학원 등에 지원하고는 이라크를 떠나버렸다. 연합군임시행정청 책임자인 브리머는 미국의 이라크 군사 점령을 담당하는 점령군 사령관 산체스와는 상극이었다. 점령 당국의 민간 책임자와 군사 책임자가 서로 대립한 탓에 점령 정책은 조율되지 않았고,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점령 정책이 표류됐다.

 

p.146

팔루자는 '100개의 모스크가 있는 도시'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도시였다. 팔루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니파 이슬람 교리는 와하비즘으로, 이는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 근본주의였다.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와하비즘은 우상숭배와 성인숭배를 거부하고, 초기 이슬람의 가르침과 이슬람 경전 문구에 대한 충실한 해석을 강조하면서 신학 논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이슬람 분파가 와하비즘이며, 따라서 지난 50여 년 동안 와하비즘은 이슬람 세게에서 그 영향력이 계속 증가했다. 문제는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팔루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라크 전쟁을 기독교 세력의 이슬람 침공이자 또 다른 십자군 전쟁으로 보는 수니파 근본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p.154~155

미국의 문제는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전쟁을 자신이 선택해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육군은 '육군 개념army concept'에 집착한 나머지 상대방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군이나 냉전 기간의 소련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게릴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일반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winning the hearts and minds)해야 하는데,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은 베트콩 병력을 사살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강력한 화력을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는 도외시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베트남 전쟁 초기에 민간인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 1968년 이후 민간인을 보호하고 민간인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전술을 변경했지만, 전쟁의 향방을 바꾸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군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소련과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지속되면서 대규모 전차 전투와 화력의 집중 사용이 강조되었고, 게릴라 전쟁에 대한 훈련은 도외시되었다. 1991년 걸프 전쟁도 게릴라 전쟁이 아니라 소련식으로 훈련된 이라크 정규군과의 전투였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p.156~157

핵심문제는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후세인 정권은 세속적인, 즉 종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정치 세력인 동시에 수니파 정권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정권을 파괴하면서 시아파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으나, 정권을 장악한 시아파는 수니파를 포용하지 않고 오히려 수니파를 권력에서 배제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이라크 국가는 종교의 영향력에서 독립적으로 구축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슬람 조앞에 기초한 두 개의 집단이 서로 대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시아파는 새로운 국가권력을 수니파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면 수니파가 어느 정도 권력을 보장받는 동시에 종교와는 독립된,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와는 거리를 두는 정치 세력이 등장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정치 세력이 2003년 3월까지 이라크를 통치했지만, 미국이 이를 파괴했다는 사실이다. 즉, 이라크에서 미국은 이라크 국가 형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후세인 정권과 유사한 정치 세력을 후원해야 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파괴한 정치 세력을 자기 손으로 부활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둘째, 이라크 내부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등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라크를 구성하는 주요 정치 세력 모두와 대립했다. 팔루자 전투는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였으며, 근본 원인은 미국 침공으로 권력을 상실하고 시아파의 탄압에 노출된 수니파의 저항이었다. 하지만 팔루자 전투를 계기로 수니파는 2005년 1월부터 시작되는 이라크 선거 등의 국가 형성 과정을 거부했고, 새롭게 출범한 이라크 국가는 이 때문에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통제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수니파의 정치 참여와 권력 공유를 보장해야 했지만, 후세인 정권이라는 수니파 정치 세력을 군사력으로 파괴한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행동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편 나자프 전투는 미국이 시아파 일부 무장 세력과 충돌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사드르가 통제하는 마흐디군과의 충돌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이는 이전에 발생한 사태의 단순한 결과라기보다는 이후의 사태 전개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수니파를 포섭하거나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요구하기가 어려웠다. 미국이 수니파에게 접근하는 경우에는 시아파의 무력 저항 가능성이 증대하고, 수니파에게 접근하지 않는 경우에는 시아파가 이라크 국가를 홀로 장악해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결국 미국은 시아파 무장 세력과의 충돌로 시아파에 대한 통제력만 상실한 채 이라크 국가 형성 과정에서 주도권을 잃었다.

 

대량살상무기 제거라는 목표가 사라진 상황에서, 미국은 이라크에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형태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나마 보유한 군사력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이라크인의 지지를 확보하기보다 화력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오히려 이라크 저항 세력에 대한 이라크인의 지지를 강화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이 파괴한 정권과 유사한, 또는 그 정권을 지지했던 수니파를 포섭해야 했지만, 이러한 포섭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미국은 오히려 이라크 내 모든 주요 세력과 대립했으며, 2004년에는 수니파와 시아파 무장 세력과 충돌하고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다. 미국의 주도권 상실은 결국 부시 행정부가 만들어낸 이라크 국가가 실패국가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p.193

모든 전쟁에는 목적이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의 연속'이며,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부시 행정부는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정치적 목적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결국 대랴야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2004년 9월 최종적으로 이라크조사단은 후세인 정권이 이미 미국의 침공 이전에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했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즉, 부시 행정부가 전쟁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추구하려던 정치적 목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가 새로운 전쟁 목적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편적으로는 이라크에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전쟁의 목적으로 거론했지만, 이것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목적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략이 불분명할 수밖에 없었고, 전략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 전술 또한 모호했다.

 

저항 세력이 이라크 안정화의 적이며 따라서 대반란작전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대부분이 동의했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즉, 저항 세력을 직접 군사적으로 공격해 섬멸할 것인지, 아니면 저항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킬 것인지의 문제였다. 2004년 주권 이양과 함께 이라크 주둔 다국적군 사령부는 케이시의 지휘하에 '이라크 전쟁의 이라크화'를 추진했으며, 저항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대반란작전을 추진했다. 하지만 '적군의 섬멸을 통한 승리'라는 방식에 익숙한 미군은 이러한 전략을 적절하게 집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저항세력과의 전투에 집중하면서 이라크 민간인을 보호하지 않았다. 2004년과 2005년 미군은 대반란작전을 실제 전략으로서 실행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구호로 활용하는 데 그쳤다는 평가까지 존재한다.

 

p.194

오래전 마오쩌둥이 지적했듯이, 게릴라와 저항 세력이 물고기라면 일반 주민은 물고기가 사는 연못의 물이다. 따라서 저항 세력을 억누르려면 연못의 물을 말려버리고 물고기가 연못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해야 한다. 하지만 미군은 이러한 방식으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미군은 그 대신 전진기지에 집결해 한 끼에 34달러나 하는 식사와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돼지고기 바비큐를 즐겼다. 사상자를 줄이고자 이라크 민간인 거주 지역에서는 장갑차를 이용해 순찰했고, 민간인과 미군 병력 간의 접촉은 최소화되었다. 이른바 '순찰 출근 commuting to patrol'이 등장하면서, 미군은 정확한 시간에 기지에서 출발했고, 미군이 사라지면 다시 저항 세력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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