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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쟁사

일본 제국 패망사

by Diligejy 2023. 8. 30.

 

p.39

역사에서 단순한 교훈은 없으며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현재로부터 과거를 배울 때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전후 아시아에서 자신들이 보여준 잔혹성을 통해 한 세대 전 일본인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p.52~53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기 시작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물결로 전제 정권들이 붕괴되었고 이에 일본 젊은 세대들 역시 극적인 영향을 받아 앞장서서 변화를 외쳤다. 여러 정당이 출현하고 1924년에는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한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정치를 게임이나 손쉬운 돈벌이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이 너무 많았고, 이 와중에 마쓰시마 홍등가 스캔들, 철도 스캔들, 한국 스캔들 등 여러 추문이 폭로되었다. 국회의사당은 뇌물 수수와 부패 문제로 난장판이 되었다.

 

일본의 서구화에 뒤따른 인구 폭발은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훗카이도와 혼슈, 규슈, 시코쿠(4개의 주요 섬을 모두 합해도 캘리포니아 면적보다 작다)는 이미 8,000만 명의 인구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국가 경제는 한 해에 거의 100만 명씩 증가하는 인구를 흡수할 여력이 없었다. 농산물 가격의 폭락으로 아사 직전에 몰린 농민들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수십만 명의 도시 노동자가 직장에서 쫓겨났다. 이런 상황은 좌익 정당과 노동조합의 설립 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에 맞서 민족주의 단체들이 진압에 나섰는데,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는 사회주의 강령에 제국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쓴 열렬한 혁명가이자 민족주의자인 기타 잇키였다. 개혁을 외치는 그의 논문 [일본개조법안대강]은 급진적이면서도 동시에 천황 숭배 사상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혁신을 외치는 모든 일본인에게 호소력을 보였다. 그는 "일본인은 서구의 참담한 예를 따르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재계, 정계, 군부 권력자들은 제국의 권력을 빙자해 부당하게 사적 이익을 취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7억 형제들은 우리의 보호와 지도력이 없으면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

 

"동서양의 역사는 내전의 시대가 막을 내린 봉건국가의 통일에 대한 기록이다. 이 시대의 국제 전쟁이 끝난 뒤에나 올 수 있는 평화는 봉건적인 평화여야 한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국가를 지배할 가장 강력한 국가의 출현으로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기타는 "국민과 천황 사이의 장벽을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국회와 내각의 벽을 허물라는 얘기였다. 투표는 집안의 가장으로 제한할 것과 아무도 100만 엔(그 당시 미화 50만 달러에 해당) 이상의 돈을 모으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주요 산업은 국유화하고 여자는 집에서 "전통 예술인 꽃꽃이나 다도를 배우도록"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55~56

과거 중국이 만주와 조선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삼고 러시아가 베링 해협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 연안 지역의 연해주를 차지하는 동안, 중국 북부의 광대한 영토는 몇백 년간 분쟁지역이었다. 수백 년 동안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온 일본은 1853년까지 영토 쟁탈전에 뛰어든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해에 미국 매슈 C. 페리 제독이 에도만으로 들어와 대포로 위협하고 중세에 머물러 있던 일본의 문호를 개방해 근대 국가로 유도했다. 일본인들은 페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최신 대량 생산 기술을 열심히 흉내냈고 독창적인 방식을 더했다. 가령 직물 공장의 여공들은 더 많은 방추를 맡으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일했다. 일본은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창설했고 유럽의 강압적인 외교 게임을 모방해 주변국에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은 불과 20~30년 만에 조선의 대부분을 통제한데다 1894년에는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손쉽게 승리를 거둔 일본은 포르모사와 만주 남단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뤼순 및 다롄을 끼고 있는 랴오둥반도의 소유권까지 차지했다.

 

불청객이 '탐스런 중국 땅' 한 조각을 차지하려는 데 놀란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는 연합해서 일본이 막 점령하는 데 성공한 랴오둥반도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랴오둥반도는 러시아 차지가 되었지만, 불과 10년도 그 땅을 지키지 못했다. 1904년, 국위에 손상을 입었다고 여긴 일본은 1904년 지구 면적의 6분의 1을 다스리는 차르에게 반격을 가했고 이 싸움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은 다시 뤼순항과 다롄항을 수중에 넣었다.

 

또한 러시아가 부설한 남만주 철도의 모든 권리도 차지했다. 일본의 속내는 서구 열강들로부터 제국주의 세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인구도 희박하고 비적이 들끓는 이 지역에 10억 달러를 쏟아부어 철도 주변의 법과 질서를 유지했다. 수십만 명의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상인과 거주민들이 치안이 유지되는 일본 관할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와 같은 인구의 대량 유입을 보면서 이시와라와 이타가키는 만주를 중국 군벌들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만주인, 조선인, 백계 러시아인 등 모든 민족 집단을 위한 안식처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이곳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면 소련을 막아내는 완충 장치 기능을 하리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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