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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쟁사

쇼와 육군

by Diligejy 2022. 9. 23.

p.15~16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은 대체로 메이지 10년대 중기부터 20년대 후기에 걸쳐 태어났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교와 같은 육군의 교육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적 지상주의가 팽배한 기관에서 기대에 상응하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실전 경험이 적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세대는 1904년(메이지 37)과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사관학교 생도였거나 아직 육군유년학교 생도에 지나지 않았다. 중대장으로 참전한 자는 있었지만 실전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 최초의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과 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근대 일본의 부국강병책에 충실한 자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가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아넹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 내부를 지배하고 있던 '조슈벌'이 그들의 힘에 의해 타파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p.16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일본 육군은 프랑스군을 모방하여 건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 ~ 1871)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하자 이후 독일군을 따랐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군을 일본에 초청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더욱이 육군유년학교에서는 독일어, 러시아어 등을 주요 과목으로 가르치고 영어 교육은 완전히 경시했다. 일반 중학교에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자만이 영어를 교육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친영미 감정을 가진 자가 몹시 적었고 일반 중학교 출신은 줄곧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현저하게 결여돼 있었다. 인간을 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p.19

이 [통수참고]라는 책자는 육군대학교 안에서 시행된 교육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군인이야말로 일본제국의 주된 역할을 하는 존재이고, 그런 군인의 행동에는 다른 어떤 집단,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자료는 물론 군 밖으로 공표되지 않았다. 만약 이 내용이 밝혀졌더라면 의원이나 언론인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겠지만, 1933~1934년이 되면서 설령 공표되었더라도 그러한 비판이 점차 압살되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p.24

[군인칙유]의 초안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다듬었는데, 기본적으로 [군인훈계]의 불투명한 부분을 일반 병사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천황의 군대라는 점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의도다. 반면 "세론에 흔들리거나 정치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무렵의 반정부적 운동(예를 들면 자유민권운동과 같은 정치활동)에 장교가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군의 기강을 공고히 세우면서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처럼 본래는 정치적 중립을 의미하는 문구인데, 쇼와 초년대 국가 개조 운동을 추진한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정치나 세론이 어떠한 형태로든 육군 내부의 움직임을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자가 많았다. 자신들이 이루려던 국가 혁신에 제약을 가하는 거서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더욱이 쇼와 10년대에 이르면, 앞서 서술한 [통수참고]에서 말하고 있듯이, 정치 지도자는 군 내 기구의 모든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까지 해석되었다.

 

p.25~26

육군대학교의 교육 기간은 3년으로, 독일 육군에서 초빙한 메켈 소좌가 독일식 참모 교육을 시행했다. 일본 육군이 다양한 측면에서 아직 정비되어 있지 않다는 데 놀란 메켈은, 구령을 붙이는 방식부터 명령을 내리는 방법과 그 시달, 그리고 실제 전투에서 방법까지도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주었다.

 

제1기생 10명은 일본 육군 최초의 엘리트 학생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1883년 4월에 입학하여 1885년 12월에 졸업했는데, 졸업 때 성적 순위가 매겨졌다. 10명을 성적순으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도조 히데노리, 야마구치 게이조, 센바 다로, 이구치 쇼고, 이시바시 겐조, 야마다 가즈오, 후지이 시게타, 사카키바라 사이노스케, 아키야마 요시후루, 나가오카 가이시,

 

이 가운데 9명은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고, 도조만이 교도단 출신이었따. 이를 통해 도조가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부사관 양성 교육기관에서 육군대학교에 추천되었고, 육군대학교에서도 메켈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도조 히데노리는 일본 육군이 존속하는 동안 가장 명예롭다 할 만한 '1기생 가운데 최고'라는 칭호를 얻었다.

 

도조 히데노리의 장남이 도조 히데키였다. 따라서 도조 히데노리와 그 아들 히데키는 일본 육군을 말할 때면 피해갈 수 없는 존재다. 도조 히데노리는 이와테 현 출신으로, 출신지 군벌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미 메이지 중기에 야마가타는 조슈벌을 만들었지만, 도조 히데노리를 비롯한 이와테 출신 장교들은 군 내에 목요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조슈벌의 횡행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 때문에 야마가타는 도조 히데노리를 싫어했고, 결국 러일전쟁이 끝난 뒤 도조 히데노리는 예비역으로 내몰렸다.

 

아들인 도조 히데키는 조슈에 대한 아버지의 혐오를 이어받았다.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도조 히데키는 1898년에 도쿄 육군유녀녀학교에 들어갔는데, 재학 중에 육군 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야마구치 현 출신)가 이 학교에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강연을 앞줄에서 듣고 있던 도조 히데키는 어린 마음에 '우리 아버지를 괴롭히는 조슈의 나쁜 군인 새끼!'라고 생각했다며 훗날 비서에게 털어놓았다. 원념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p.32

청일전쟁 때에는, 헌법과는 별도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또는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 천황 등의 인간관게로 제도상의 미비점이 보완되었다. 이는 교묘하게 원칙과 운용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훗날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 오로지 원칙만이 활보하게 된다. 예전처럼 인간관계로 국가가 움직이는 시대는 아니었기 땜누에 메이지 시기에는 은폐되어 있었던 모순이 모든 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p.41~42

러일전쟁의 전사자 약 8만 4000명은 청일전쟁 때의 여섯 배가 넘는 수치인데, 그 가운데 95퍼센트 가까이가 부사관 이하 병사였다. [육군군의학교오십년사]에 따르면 총상이 약 80퍼센트, 포상이 17퍼센트, 그리고 폭격으로 인한 부상이 2.5퍼센트에 달했다. 이것은 화기의 진보가 두드러졌음을 의미한다. 또, 일본군은 보병의 사망률이 높았는데, 이는 보병이 러시아군 요새를 육탄 공격하는 것을 공병이나 포병이 엄호하지 못한 싸움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전사한 병사 중에는 예비역인 30대 병사가 많았고, 아울러 한 집안의 생활을 지탱하는 세대주가 많이 희생되었다. 생계의 어려움에 빠진 가족이 늘어나면서 후방에서 부조를 담당할 기관을 꾸리는 거서도 국가의 의무가 되었다. 하지만 필요한 만큼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고, 병사를 내보낸 가족 중에는 일가 모두가 이산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p.45

가족주의는 부모가 말하는 것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복종'의 강요였다. 역시 [군대내무서]에는 "복종이란 상하구별을 어지럽히지 않고, 하급자는 상급자를 따라 그 명령대로 모든 일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속히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가족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이는 아들이 부모를 따르고 아내가 남편을 따르는 것과 같다"고 명시되어 있따. 철저한 가족주의는 쇼와 육군에 와서도 유지되었다. 대대 중대 소대로 편제가 소규모일수록 그 안에서는 의사 가족이라는 단위가 연출되었고, 전투를 거듭함에 따라 정신적인 유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p.59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인들은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일등국'이 되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국민은 일등국이라는 말을 유쾌하게 받아들였고, 메이지 유신 이후 추진해온 부국강병책이 열매를 맺은 증거라며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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