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6
우리가 문학이란 이름으로 행해온 비판적 지성의 모든 것들이 어딘가 보일 듯 말 듯한 과거의 것으로 숨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공동의 문제, 우리 공동의 명제, 우리 공동의 전망이 이렇게도 가위로 오려낸 듯이 사라져버릴 수 있단 말인가.
p.62
가족들이 확실히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나 하나 줄어들어 문득 나 혼자 여기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 같다.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이렇게 나만 남게 되었다. 정말 SF다. 우주의 어둠이다.
p.87
해체된 소련 연방, 샅샅이 토벌되는 오르그의 사람들, 모스크바의 식량 폭동, 강남의 휘황한 불빛-기고만장한 졸부들의 축제, 천안문의 학살, 미국의 역겨운 미소, 저 거대한 절벽에 얼어붙은 우리들의 찌든 얼굴. 나의 아픔은 내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강렬한 꿈을 가졌다. 꿈은 분수처럼 솟아올라 물방울처럼 흩어졌다. 나는 일종의 애수를, 아니 거의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지금보다 더 젊었던 날들을 회상한다. 그 날들은 참을 수 없이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볍게, 내일이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그 무엇처럼 가볍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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