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AIG의 구제가 대통령 선거의 해에 정치적으로 둘 수 있는 최악의 수라는 것을 알았다. 그보다 불과 2주일 전에 대통령이 소속한 공화당은 2008년 전당대회 정강에서 "우리는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의 구제금융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연방준비제도가 제안한 개입은, 기업들이 시장의 원칙에 따라야 하고 정부는 기업의 과실로부터 기업을 보호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원칙을 어기게 된다. 그러나 지금처럼 제반 금융 여건이 혼란에 빠졌을 때, 만약 AIG가 파산하면, 그 상황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어 미국과 세계경제에, 분명히 재앙적인 결과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자산이 1조 달러를 넘는 AIG는 리먼보다 규모가 50% 이상 더 컸다. 이 회사는 130개국 이상에서 영업을 했고, 세계적으로 7,400만이 넘는 개인과 법인 고객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AIG는 미국 근로자 총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억 600만 명을 고용한 18만 개의 중소기업 및 여타 법인체에 상업보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 회사의 여러 가지 보험 상품들은 수많은 지방 자치체와 기금을 보호하고 401k에 가입한 사람들을 보호했다. AIG의 붕괴는 미국과 해외 양쪽에서 더 많은 초대형 금융회사들의 도산을 촉발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p.43
당시 조겐슨 교수님은 에너지 경제학에 관심이 많으셨다. 에너지 경제학은 석유 가격이 급등하여 인플레이션과 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던 1970년대 미국 경제에 아주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나와 조겐슨 교수님의 연구는 내가 졸업 논문을 쓰는 데에 기반이 되었다. 졸업 논문에서 나는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학부 시절, 나는 조겐슨 교수님과 공동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적도 있었다. 교수님과 나는 정부가 천연 가스 가격에 상한을 정했을 때에 어떠한 결과가 발생할 것인지를 분석했는데, 가격 상한 정책은 새로운 천연 가스 공급원의 개발을 저해하여 궁극적으로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수님은 이러한 주제에 관해서 의회에서 증언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를 의회까지 데리고 가셨다.
p.44-45
1940년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은 젊은 폴 새뮤얼슨이 하버드에서 MIT로 옮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노벨상을 받았고 역사상 가장 널리 읽힌 경제학 교과서를 집필했던 그는 MIT 대학원 시절에 이미 경제학에 정교한 수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새뮤얼슨의 수학적 접근 방법은 반유대 정서가 남아있는 보수적인 하버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MIT로 떠났던 것이다. 1949년에는 미래에 노벨상을 받았던 성장 이론가 로버트 솔로가 새뮤얼슨을 뒤따랐다. 경제학에서 수학적, 통계적 방법이 각광을 받게 되자, MIT는 수량적인 접근 방법을 꽃피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1975년에 내가 MIT에 입학했을 때에 그곳에서는 수학적 접근방식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지만, 경제학계는 케인스주의 경제학과 신고전주의 경제학 간의 새로운 논쟁에 빠져들고 있었다.
새뮤얼슨과 솔로가 신봉하는 케인스주의는 영국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사상에 기반을 둔다. 대공황에 대한 처방을 찾으려고 했던 케인스는 호황과 불황을 설명하는 일반이론을 개발했다. 케인스의 저작에는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오고, 경제사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케인스의 주장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케인스를 추종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케인스의 분석은 주로 임금과 적어도 어떤 가격의 "경직성"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임금과 가격은 완전고용과 자본금(공장과 설비)의 완전한 이용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하게 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케인스 이론에 따르면, 기업이 수요의 예상하지 못한 감소 - 예를 들면, 설비 투자 혹은 정부 지출의 감소 - 때문에 판매 부진에 빠져들어 생산을 줄이고 노동자를 해고하면 실업자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케인스주의자들은 대공황 시기에 만연한 실업을 자원이 낭비되는 상태로 간주한다. 그리고 정부가 적절하게 개입하면 이런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들은 재정 부양책(조세 감면 혹은 정부 지출의 증가)과 통화 부양책(금리인하)을 수요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완전고용과 자본금의 완전한 이용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p.47-48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정부 개입의 필요성과 효과에 대해 비판적이다. 특히,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위해서 임금과 가격이 신속하게 반응할 때에 통화정책은 생산과 고용에 기껏해야 일시적인 효과를 가질 뿐이다.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에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각광을 받은 것은 어느 정도는 방법론에서 혁신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케인스 경제학의 약점을 인정하면서도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제시하는 결론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제학자들도 많았다. 특히, 통화정책이 생산과 고용에 일시적인 효과만을 가질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1980년대 초반이 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거의 잃었다. 당시 볼커가 이끄는 연방준비제도는 경기를 냉각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 금리를 크게 인상했다.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심각한 침체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상황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은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학자들은 신고전주의 경제학파의 직관과 선진화된 분석기법을 도입하여 신케인스 학파를 개척했다. MIT에는 북로디지아에서 태어난 젊은 경제학자 스탠리 피셔가 있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케인스주의 경제학을 통합하려는 그들의 작업은 신케인스주의적 종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이러한 종합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신케인스 학파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모델과 접근 방법을 사용하여 임금과 물가의 경직성으로 인해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관점을 부활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침체를 자원의 낭비라 보고 경제가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적절히 추진해야 한다는 과거의 케인스주의자들의 시각으로 되돌아갔다.
p.54-55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대부분 동안 나는 거틀러와 함께 금융 시스템이 지닌 문제들이 어떻게 경기 하강을 악화시킬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우리는 우리가 "금융 가속기"라고 불렀던 현상을 확인했다. 다시 말하면, 침체는 신용경색을 동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침체가 닥치면, 은행은 손실이 커지면서 대출 결정에 더욱 시눚ㅇ해진다. 반면에 차입자들은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신용도 악화된다. 은행이 대출 결정에 더욱 신중해지고 차입자들의 신용이 악화된다는 것은 신용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가계의 소비와 기업의 투자가 위축된다. 이처럼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면 침체는 더욱 악화된다.
우리의 연구는 건전한 금융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가계와 기업이 채무가 많은 상태에서 출발하면 침체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차입자의 소득과 이윤이 감소하면, 채무를 상환하거나 차입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침체가 시작될 때에 은행 시스템이 나쁜 상태에 있다면, 침체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대공황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 은행 시스템이 붕괴되면, 침체가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
또한 금융 가속기 이론은 가계와 기업이 구매를 늦추는 경향뿐만 아니라 디플레이션이 해로운 이유를 설명한다. 임금과 물가가 하락하거나 심지어는 의외로 덜 증가한다면, 차입자의 소득은 대출금 상환을 충분히 지속할 만큼 증가하지 않을 것이다. 대출금 상환에 어려움을 느낀 차입자는 당연히 다른 지출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더 이상의 신용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1930년대 디플레이션은 파산과 채무불이행을 만연시켰고, 이미 나빠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중앙은행가와 정책 입안가라면 대공황이 주는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침체나 디플레이션, 혹은 둘 다가 겹치는 시기에는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정상적인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화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둘째, 정책 입안자는 금융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신용 흐름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대공황이 주는 또다른 교훈은 이례적인 상황에 직면한 정책 입안자라면,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사고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를 들면, 1933년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루기 힘든 불황에 맞서서 대담한 실험을 했다. 그 중에서는 실패한 실험도 있었다. 제조업에서 경쟁을 완화하여 가격 하락을 중단시키려고 했던 1933년 국가산업부흥법이 그 예였다. 그러나 다른 실험들은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두드러지게는 1933년에 취한 일련의 조치들 중에서는 금본위제도를 버리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시 정통주의적인 정책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었다. 통화공급이 정부가 보유한 금의 양에 의해서 더 이상 제한받지 않도록 하자, 디플레이션은 당장 멈추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국의 은행 문을 일시적으로 닫고(은행 홀리데이) 건전한 은행만이 다시 문을 열도록 하고 연방예금보험공사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함으로써 극심한 금융위기에서 빠져나왔다. 이러한 조치들은 정통 경제학자, 보수적인 기업가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실험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이러한 조치들이 먹혀들었다.
p.59
중앙은행이 자신의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미래의 계획 혹은 과거의 성과에 관해서 공식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가지는 것은 물가안정목표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뉴질랜드의 중앙은행은 1990년부터 물가안정목표제를 선언하고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1991년에는 캐나다가 물가안정목표제를 선언했고, 그 다음에는 영국, 스웨덴, 호주, 칠레, 이스라엘 등이 뒤를 따랐다. 결국 선진국과 신흥국가를 포함하여 수십 개의 국가들이 물가안정목표제를 선언했다.
1997년 미슈킨과 나는 후속 연구에서 얼리 어댑터의 경험을 살펴보고는 미국이 물가안정목표제를 통해서 혜택을 볼 수 있는지를 검토했다. 이 문제는 논란을 일으켰다. 그 동안 연방준비제도는 물가안정목표제 선언에서 발생하는 제약이 없이 경제 흐름에 유연하게 반응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재량에 오랫동안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물가안정목표제 선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폴 볼커와 앨런 그린스펀 시절의 연방준비제도는 자유재량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하여 인플레이션을 1980년의 13.5%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2% 정도로 낮추었다.
그럼에도 미슈킨과 나는 물가안정목표제가 미국 통화정책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쉽게 변하지 않는 물가안정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경제가 호조를 띠는 동안에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킨 볼커와 그린스펀의 정책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제도적인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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