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2
비트코인은 예기치 못한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보호받는 화폐를 사용하여, 제3자를 신뢰할 필요 없이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분산형 소프트웨어라고 이해하는 편이 가장 좋다.
p.21
'교환매개'는 화폐(돈)를 정의하는 본질적 기능이다. 다시 말해 화폐(돈)는 무엇보다도 다른 물건과 바꾸는 재화지, 써 버리는 재화(소비재)도 아니고 다른 재화를 생산하는 데 이용하는 재화(투자 또는 자본재)도 아니다. 물론 투자도 수입을 얻어 다른 물건과 바꾸려고 하는 일이지만, 세 가지가 돈과 다르다.
첫째, 투자는 수익을 만들어내지만 돈은 그렇지 않다.
둘째, 투자에는 언제나 실패할 위험이 따르지만 돈은 위험이 가장 낮다(고들 생각한다).
셋쨰, 투자는 돈보다 유동성이 떨어지며, 소비하려면 매 번 상당한 거래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 정도면 왜 돈의 수요가 항상 존재하고, 왜 투자가 돈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지 이해가 간다. 인생의 전제는 불확실성이고, 돈이 언제 얼마나 필요할 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p.24~25
어떤 돈의 가치가 얼마나 견고한지 파악하려면, 그 재화의 공급과 관련한 다음 두 가지 숫자를 보면 된다.
(1) 저량(stock) : 이제껏 생산된 양에서 이제껏 소비되거나 파괴된 양을 뺀, 기존 공급량
(2) 유량(flow) : 앞으로 일정 기간 동안 추가로 생산될 양.
저량과 유량의 비율은 그 재화가 돈으로서 얼마나 견고한지, 그래서 돈으로 쓰기에 얼마나 적당한지 보여주는 믿을만한 지표다. 어떤 재화의 저량이 유량에 비하여 비교적 적다면, 즉 저량/유량 비율(stock-to-flow ratio)이 낮다면, 사람들이 가치저장 수단으로 쓰기 시작할 때부터 공급량이 급격히 늘 수 있다. 그런 재화를 가치저장 수단으로 택하면 가치를 유지하기 어렵다. 저량/유량 비율이 높을수록 시간이 흘러도 가치를 유지하여 시간을 뛰어넘는 판매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사람들이 경화, 즉 저량/유량 비율이 높은 재화를 가치저장 수단으로 택한다면 가치를 저장하려고 그 재화를 사는 사람이 많아지므로 수요가 늘어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그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에게 생산량을 돌릴 동기가 생긴다. 그런데 원래 추가 생산분이 기존 공급량에 비하여 적으니, 추가분이 늘어난다고 해 봤자 가격이 크게 떨어질 가능성은 낮다. 반면 사람들이 연화, 즉 저량/유량 비율이 낮은 재화에 가치를 저장하기로 선택할 경우에는, 그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이 공급량을 크게 늘리는 것이 쉽기 때문에 가격이 떨어진다. 그래서 결국 재화 가치가 낮아지고 저축한 사람이 부를 도둑맞는 꼴이 되며, 시간을 뛰어넘는 판매가능성이 무너진다.
p.50
어떤 물건이든 가치저장 기능을 잘 수행하려면 "가치저장 수단으로서 수요가 늘면 가격이 올라가야 하는 한편, 생산자는 가격이 크게 떨어질 정도로 공급을 부풀리지 못할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난제를 풀어내야 한다. 그런 상품이 있다면 이를 가치저장 수단으로 쓴 사람이 보상을 받고 장기적으로 부를 늘리게 될 것이다. 다른 상품을 선택한 사람도 앉아서 재산을 잃지 않으려면 이미 내린 결정을 뒤집고 더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의 선택을 베낄 것이므로 해당 상품은 가장 중요한 가치저장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 내내 벌어진 이 경쟁에서 승자는 단연 금이다. 금이 화폐 기능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다른 상품과 구분되는 두 가지 독특한 물리적 성질이다. 우선 금은 화학적으로 안정되어 사실상 파괴되지 않는다. 둘째, (연금술사가 믿었떤 바와 달리) 다른 물질을 합성해서 만들 수 없으므로 얻으려면 원석에서 추출해야만 하는데, 지구에는 금 원석이 극히 드물다.
p.58
황제는 아우레우스의 금 함량을 줄여 화폐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리고 공급을 늘린 덕에 계속 방만하게 지출할 수 있었지만, 그리하여 인플레이션과 경제 위기가 벌어지면 황제는 상황을 개선하려고 다시 화폐의 함량을 줄이는 그릇된 시도를 했다. 이 과정을 페르디난트 립스(Ferdinand Lips)가 요약한 다음 내용은 오늘날 독자에게도 교훈이 된다.
로마 황제들이 경제를 '관리'하려는 데 몰두했지만 상황을 더 악화했을 뿐이라는 사실에는 현 세대 투자자 뿐 아니라 현대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도 주목해야 한다.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고 법정통화를 관리하는 법을 제정해 봤자 밀물을 막으려는 노력과 다를 바 없었다. 폭동, 부패, 무법, 맹목적 투기와 도박 열풍이 역병처럼 제국을 휩쓸었다. 화폐가 가치를 절하당하여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진 당시에는 상품을 만들기보다 상품에 투기하는 편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p.67
은이 화폐 기능을 잃자 당시에 은을 본위화폐로 사용하던 국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인도 루피 가치가 유럽 국가의 금본위화폐에 비하여 계속 떨어지자 영국 식민 정부는 운영경비를 대려고 세금을 올렸는데, 그 때문에 영국 식민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이 늘었다. 프로이센-플아스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금으로 가치가 포장된 파운드 스털링을 본위화폐로 삼기 시작한 1898년까지 27년 동안 루피 가치는 56% 떨어졌다. 1935년까지 은본위제를 유지했던 중국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은 가치가 인도 사례와 같은 기간 동안 78% 사라졌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과 인도가 20세기 동안 서구를 따라잡는 데 실패한 이유는, 두 나라가 사용하던 화폐성 금속이 화폐 기능을 잃으면서 부와 자본이 엄청나게 파괴되었던 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결국 은이 화폐 기능을 잃자 중국인과 인도인이 처한 상황은 아그리 구슬을 쓸 때 유럽인을 맞아들인 서아프리카 인과 사실상 같다. 국내에서 경화였던 것이 외국에서는 연화였기 때문에 외국의 경화에 밀려났고, 그 과정에서 중국과 인도의 자본과 자원은 점점 더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비트코인을 거부하기만 하면 신경 쓸 필요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아주 중요한 이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역사가 말하듯, 남이 더 견고한 돈을 보유하면 자기도 영향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p.75-76
중앙은행들이 말로는 금의 화폐 기능이 끝났다고 계속 선언했지만, 진실은 금 보유고를 유지하는 행동에 드러난다. 화폐 경쟁 관점에서 보면 금 보유고 유지는 완벽히 이성적인 판단이다. 외국 정부가 발행한 연화를 보유한다면 시뇨리지(화폐의 액면가에서 제조 비용을 뺀 이익), 즉 화폐발행차익은 자국 중앙은행이 아니라 외화를 발행하는 국가에 쌓이는데, 외화 가치가 떨어지면 자국 화폐 가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앙은행들이 보유한 (전 세계 금 비축량 대비 약 20%로 추정되는) 금을 일제히 내다팔 때 가장 있음직한 효과는, 금은 산업용으로나 미적으로나 높이 평가받기 떄문에 거의 떨어지지 않은 가격에 매우 빨리 팔려나가고 중앙은행의 금 보유고는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정부가 발행한 연화와 금이라는 경화 사이에 화폐 경쟁이 벌어진다면 장기적으로 승자 하나만 남을 확률이 높다. 말보다 행동을 보면 확연하듯,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세상에서조차 정부는 금에서 화폐 기능을 빼앗아가지 못했다.
p.82-83
돌이켜보면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전에 벌어진 국지전을 구분하는 중대한 차이는 지정학도, 전략도 아니고 바로 화폐였다. 금본위제 시절에 정부는 엄청난 금 보유고를 직접 통제했고 국민은 금 보관증을 주고받았다. 지폐를 손쉽게 더 많이 발행하는 권한은 자국 시민에게 과세하기보다 훨씬 편리하므로 분쟁이 불붙은 상황에서 도저히 거부하기 힘들 만큼 매력적이었다. 주요 교전국은 모두 전쟁이 시작한 지 몇 주 만에 금태환을 정지하여 사실상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고, 금으로 태환할 수 없는 정부 발행 서류를 돈으로 삼는 명목화폐제로 자국민을 밀어넣었다.
금태환 정지만으로 정부는 국고에 든 돈이라는 한계를 넘어 사실상 전 국민의 모든 부를 전쟁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을 더 찍어낼 수 있고, 또 그 돈을 자국민과 외국인에게 통용시킬 수 있는 한, 전쟁 비용을 계속 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금을 지니고 화폐로 썼던 종전 화폐 제도에서 정부가 투입할 수 있는 전쟁비는 국고에다 세금 징수액, 채권 발행액을 더한 정도가 한계였다. 그래서 20세기 이전에는 분쟁 규모에 한계가 있었고 전 세계는 비교적 긴 평화기를 누렸다.
유럽 국가들이 금본위제에 머물렀더라면, 또는 유럽 사람들이 금을 자기 손에 쥐고 있어 정부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세금밖에 기댈 곳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양 진영 중 하나에서 자금이 부족해지고, 자기 돈으로 자국 정권을 지탱하기를 원하지 않는 국민에게 재산을 뽑아내기도 힘들어져, 제1차 세계대전이 군사 분쟁으로서는 몇 달 만에 종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금본위제가 정지되자 국고가 바닥나는 정도는 전쟁을 멈출 이유가 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으로도 국민이 쌓아온 재산을 더 이상 뽑아 올리지 못할 정도는 되어야 했다.
p.129
인생에서 결정을 내릴 때 영향을 끼치는 주요 요인은 그 사람의 시간선호다. 한 사람의 시간선호와 자기 통제력은 상황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의사결정의 모든 측면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기는 한다. 한 사람의 운명은 대체로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이 벌이는 거래에 따라 결정된다는 현실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한다. 실패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성공을 다른 사람 덕으로 돌리려 해 본들, 어떠한 환경과 조건보다 중요한 요인은 자신과 끝없이 벌이는 거래다. 시간선호가 낮은 사람이라면 환경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미래의 자신을 우선하여 목표를 달성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반면 시간선호가 높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운이 좋다 한들 결국 미래의 자신에게 방해가 되고 해를 입히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p.167
"실업이 연이어 일어나는 원인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기업이 올바로 돈을 벌 권리를 부정하는 정부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p.179-180
건전화폐를 사용하는 자유 시장 경제에서는 소비를 미뤄야 저축할 수 있다. 은행에 저축된 돈은 지금 소비하지 않고 만족을 연기하여 미래에 더 큰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에게서 가져온 돈이다. 저축된 금액은 생산자에게 대출 가능한 금액과 정확히 동일하다. 사용 가능한 자본재 양은 소비 감소분과 같을 수밖에 없다. 형태가 있는 자원, 노동력, 토지, 자본재 가운데 자본재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양 만큼은 최종 소비재를 공급하는 데 들어갈 양에서 빠진다. 예컨대 노동시장에 새로 들어오는 노동자가 자동차 판매 대리점이 아니라 자동차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옥수수 종자를 먹지 않고 땅에 심은 셈이다.
모든 경제학의 기본 출발점인 희소성은 모든 것에 기회비용이 있다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함축한다. 자본시장에서 투자의 기회비용은 발생하지 못한 소비고, 소비의 기회비용은 발생하지 못한 자본 투자다. 이 관계를 조절하는 가격이 바로 이자율이다. 투자를 원하는 수요가 늘어나면 이자율이 올라가 저축자가 더 많이 저축할 유인을 얻는다. 이자율이 떨어지면 투자자는 투자를 늘리고, 또 생산 주기가 더 길고 더욱 발전한 기술을 사용하는 생산 방식에 투자할 유인을 얻는다. 그렇다면 낮은 이자율은 생산 주기가 더 길고 생산성이 더 높은 생산 방식을 도입할 수 있게 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사회는 낚싯대로 낚시하던 시절을 벗어나 대형 동력선으로 낚시하는 시대로 움직인다.
경제가 점점 발전하고 복잡해지면 물리적 자본과 대출 시장의 실체 관계는 변하지 않는 반면 사람들은 둘을 점점 혼동하게 된다. 중앙은행을 갖춘 현대 경제는 이러한 근본적 상충관계를 무시한 채, 소비자가 소비를 포기하지 않아도 은행이 새로 돈을 찍어 투자 자금을 댈 수 있다는 가정을 토대로 건설되었다. 저축과 대출 가능 금액을 잇던 연결고리가 끊긴 지금은, 그 관계를 무시할 때 발생하는 재앙은 고사하고 심지어 관계 자체를 가르치는 경제학 교과서조차 없다.
p.200-201
변동환율제라는 불안정한 모래 늪 위에 자유로운 자본 흐름과 자유 무역이라는 집을 짓게 되면 훨씬 많은 기업과 전문가가 환율 움직임에 신경 써야 한다. 모든 기업이 자원과 인력을 투입하여,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통제하기는 절대 불가능한 쟁점을 연구해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중앙은행과 각국 정부의 행동, 환율 변동을 예측하는 데 필요하게 된다. 이처럼 정교한 중앙 계획 조직과 여기서 실행하는 의식은 결국 경제 활동에 영향을 끼친다. 현대 세계경제 현황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아마도 생산적 경제활동 규모 대비 외화시장 규모일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ank of International Settlements)은 2016년 4월 현재 외화시장 거래규모를 매일 5.1조 달러로 추정했으니 1년이면 1,860조 달러 정도 되는 셈이다. 세계은행 추정에 따르면 2016년 전 세계 GDP는 약 75조 달러다. 즉 외화시장 규모는 지구 전체 경제생산 규모의 25배 정도라는 얘기다. 그런데 외화거래가 생산적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외화 거래량은 GDP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다. 화폐를 다른 화폐와 바꾸는 행동은 경제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이 아니라, 여러나라에서 쓰려고 여러 나라 화폐를 다 가질 때 겪을 불편을 덜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일 뿐이다. 경제학자 한스헤르만 호페가 말한 '전 세계적 부분 물물교환 체제' 때문에 국제 무역의 효용이 손상되는데, 그 피해를 완화하는 데 들어가는 거래비용이 또 엄청나다.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느라 전 세계에서 자본과 노동력이 엄청나게 낭비될 뿐 아니라, 전 세계 기업과 개인이 환율 변동이라는 모래 늪 때문에 경제 계산을 빈번하게 실수한 탓에 상당한 손실도 발생한다.
p.258-259
나카모토는 철저하고 엄격한 증명(proof)과 검증(verification)에 기반을 두고 비트코인을 만들어 냄으로써 제3자를 신뢰해야 할 필요를 없앴다. 비트코인의 작동 특성 중 핵심은 검증이고, 오직 검증 덕분에 비트코인에 신뢰가 전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마땅하다. 네트워크 구성원 모두는 모든 거래를 기록하는데, 그리하여 잔액과 거래를 모두 기록한 장부를 공유한다. 네트워크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에게 얼마를 이체할 때마다 모든 네트워크 구성원은 송신자의 잔고가 충분한지 검증할 수 있고, 각 노드는 10분마다 새로운 거래 블록을 장부에 제일 먼저 기록하려고 경쟁한다. 노드가 거래 블록 하나를 장부에 기록하려면, 연산력을 소모하여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이 문제는 풀기에는 복잡하지만 답이 맞는지 검증하기는 쉽다. 이처럼 블록을 기록하고 네트워크 구성원 모두에게 검증받으려면 정답을 맞혀야 하는 구조가 작업증명(proof-of-work, PoW) 체계다. 여기서 쓰이는 수학 문제 자체는 비록 비트코인 거래와 무관하지만, 블록에 부당한 거래가 포함된다면 노드가 답을 푸는 데 쓴 연산력이 낭비되도록 만듦으로써 비트코인 시스템이 돌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노드가 작업증명을 올바르게 풀어내고 거래를 공표하면 네트워크에 있는 다른 노드들은 블록이 타당한지 투표하고, 그 블록을 스인하자는 표가 과반이 되면 노드들은 거래를 새긴 새 블록을 기존 블록체인 마지막에 붙어 있던 블록 뒤에 덧붙인 후, 새 작업증명을 풀기 시작한다. 이 때 타당한 거래 블록을 네트워크에 기록한 노드가 새로 발행된 비트코인 및 거래한 사람이 지불한 거래수수료를 합한 블록보상(block reward)을 받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p.261-262
비트코인이 안전한 것은 장부에 거래를 기록하기 위해 작업증명을 푸는 비용과 작업증명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비용 사이에 큰 격차가 있기 떄문이다. 거래를 기록하는 데 드는 전력과 연산력은 점점 커지지만, 비트코인 발행량이 늘어나더라도 거래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비용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계속 0에 가까울 것이다. 채굴자가 부당한 거래를 비트코인 장부에 기록하려 해도, 다른 노드는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이를 거부하고 채굴자가 블록보상을 받지 못하게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작업증명을 푸는 데 들인 자원이 낭비될 뿐이다.
이미 기록된 장부를 바꾸려면 이미 사용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사용된 에너지가 점점 늘어나므로 장부를 바꾸기도 더욱 어려워진다. 이처럼 매우 복잡한 과정이 반복하면서 규모도 커져 엄청난 연산력과 전기가 들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제3자의 신뢰성에 전혀 기대지 않고도 소유권과 거래를 논쟁의 여지없이 기록한 장부를 만들어냈다. 비트코인의 토대는 신뢰 0%에 검증 100%다.
p.380-381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 탈중앙 자율조직)는 이더리움 네트워크에서 처음 실현한 스마트 계약이다. 이 스마트 계약에는 1억 5천만 달러가 넘는 돈이 투자되었는데, 그 후 어떤 사람이 이 코드를 실행하여 DAO의 전체 자산 중 약 1/3 가량을 자기 계좌로 옮기는 공격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공격을 절도라고 말하기는 부정확하다. 돈을 입금한 모든 사람은 오직 코드만이 자기 돈을 통제한다는 데 동의했고, 공격자는 입금자가 동의한 대로 코드를 실행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DAO 해킹의 여파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더리움 개발자들은 이렇게 불편한 실수가 일어나지 않은 이더리움의 새 버전을 만듦으로써 공격자의 자금을 몰수하여 희생자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이 주관에 따라 다시 개입한 것은 코드만을 법칙으로 삼는 객관성과 상충되며, 따라서 스마트 계약의 존재 근거가 모두 의심받게 된다.
연산력 기준으로 두 번째로 큰 네트워크에서조차도 개발자의 이익에 맞지 않는 거래가 일어날 경우 블록체인 기록을 바꿀 수 있다면, 알트코인 모두가 정말 연산력으로만 규제받는다고 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사실상 벤처기업 주주나 다름없는 몇몇 사람들에게 화폐, 연산력, 프로그래밍 기술이 집중된다면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할 이유가 전혀 없다.
p.386-387
비트코인이 진실하고 타당한 장부를 만들어 내는 데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장치를 쓰는 목적은 명백하다. 제3자를 신뢰하지 않고도 온라인에서 화폐를 발행하고 가치를 옮기기 위해서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쓰는 표현이지만) '블록체인 기술'은 온라인 거래를 효율적이고 저렴하고 빠르게 하는 방식이 아니다. 사실은 중앙화 방식에 비하여 매우 더디고 효율이 낮다. 유일하게 우월한 부분은, 제3자의 중개를 신뢰해야 할 필요를 없앴다는 데 있다. 제3자가 중개할 필요를 제거하여 최종 사용자가 얻는 가치가 엄청나기 때문에 비용 상승과 효율 감소라는 단점을 감내할 만한 분야가 아니라면 이 기술을 적용할 의미도 없다. 그리고 실제로 제3자 중개를 제거해 낸 유일한 과정은 비트코인 네트워크 고유의 토큰을 옮기는 과정뿐이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코드로는 네트워크 외부에서 발생하는 것 중 무엇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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