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3
국가는 부자(기득권층) 시민과 가난한 시민으로 이뤄진다. 군주(통치자)는 부자의 미움을 받아서도 안 되고, 가난한 시민의 증오를 받아서도 안 된다. 부자의 미움을 사면 음모의 희생양이 되고, 가난한 시민의 증오를 사면 혁명의 희생자가 된다. 증오가 미움보다 무섭다. 통치자는 부자의 욕망도 채워줘야 하고, 가난한 다수 시민의 욕망도 충족시켜줘야 한다. 그런 통치자가 진정한 군주 중의 군주이다. 그런 군주는 통일된 나라의 군주가 될 수 있다.
p.56~57
1장은 '못 박기' 장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역 설정' 장이다. 마키아벨리는 첫 줄에서 정체는 공화정과 군주정, 단 두 가지뿐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체를 이 두 가지만으로 나누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철인통치, 군주정, 참주정, 과두정, 귀족정, 민주정, 폭민정 등 다양한 정체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당대만 놓고 보더라도 부자들로 구성된 정체나 귀족들로 구성된 정체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마키아벨리는 단 두 유형의 정체만 이야기했을까?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마키아벨리가 2장 들머리에서 언급하듯이,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정을 다루고, <군주론>에서는 군주정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석연치 않다. 과연 마키아벨리가 글쓰기의 편의를 위해 정체를 단 두 개로 나누는 자의적인 편법의 칼을 들이댔을까?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문학가라고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가 과연 철학적, 역사적, 현실적 사례가 풍부한 수많은 정체의 격렬한 항의를 무감각하게 무시할 정도로 여러 정체에 연민이 없었을까?
문제의식을 바꾸어보자. 왜 마키아벨리는 두 가지 정체만 존재한다고 단언했을까?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첫 문장에 대한 해명인 동시에 그가 구축한 정치학 전체의 의도를 찾아내는 열쇠가 된다. 그는 군주와 인민, 또는 군주와 시민으로 구성된 정체 외에는, 예컨대 귀족이나 부자들로 구성된 정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것이 정답이다.
p.95
마키아벨리는 식민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식민단은 피해자가 소수라는 점이 장점이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은 다수는 사소한 실수가 모반이나 역모로 비쳐져 토지 등을 박탈당한 소수처럼 모든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땅을 빼앗긴 주민 수가 적기 때문에,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다수의 두려움이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 극단적인 공포감이 지배하는 정복지, 이것이 식민단의 저항 예방 효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수에게 주는 공포의 극대화는 피해자의 최소화에 바탕을 둔다. 피해자가 적을수록 지배의 정당성은 더 확보되고 통치 기간도 길어질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정복한 국가의 완전한 일부가 될 수 있다. 식민단 파견은 극소수에게만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다수의 인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억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인민관의 표출이다.
p.96-97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은 동물의 본성과 일치한다. 동물은 자기보다 조금 강한 동물에게, 자기가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 동물에게는 끊임없이 도전한다. 하지만 자기보다 월등히 강한 동물,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 같은 동물에게는 도전할 꿈도 꾸지 않는다. 오히려 보기가 무섭게 달아난다. 그는 이 점에서 인간 역시 동물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 주문을 읽고서 '마키아벨리는 무서운 사람이다. 마키아벨리즘을 실천하는 자는 무서운 자이므로 멀리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마키아벨리의 이 주문은 무엇을 연상케 하는가? 바로 신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란 곧 신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응징 아니면 은혜이다. 신은 인간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인내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다면 철저하게 응징하는 존재이다. 신은 인간이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치졸한 일로 복수를 하지만, 복수를 할 땐 다시는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응징한다. 예컨대 응징의 신, 제우스를 보라. 한 손에 번개를 들고 자기 맘에 안 드는 신과 인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괴롭히는가! 자기에게 도전할 것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는 철저하게 제거해버린다.
인간 중의 최고 지위에 있는 군주는 바로 신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즘의 핵심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 2권 23장에서 이런 관점을 국가 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분석한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로마이다. 로마는 정복한 국가에 대해 신과 같은 존재로 행동했다. 카르타고를 정복한 로마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응징했다. 수십 년간 풀 한 포기 나지 않도록,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도록 소금을 뿌려 땅을 불모지로 만들어버렸다.
마키아벨리는 통치란 백성이 군주를 해치지 못하게 하거나, 백성이 해칠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다루는 것으로 보았다. 전자는 응징이고, 후자는 보은이다. 전자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짓밟는 것이고, 후자는 감읍하여 마냥 고마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정복한 국가와 정복당한 국가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로마의 카밀루스는 '벌 아니면 은혜'라는 단 두 가지 기준으로 정복지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벌을 받아야 하는 정복지는 파괴하고 나서 식민단을 파견했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 지역은 면세나 특권을 인정하고 안정을 보장해주었다.
p.109-110
'인지하면 준비하라!'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인지하면 행동하라!'라고 주문한다. '소모성 열병이건 정치적 문제이건 전쟁이건, 인지하면 기다리지 말고 대응하라! 무엇이든 초기에 발견하면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지만, 발병 뒤에 깨닫게 되면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전쟁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피하지 말고 즉각 전쟁을 개시하라!'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로마의 전쟁을 다시 언급한다. 그는 이 책에 기술된 로마 시대의 군주라면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당시 로마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당시 로마는 3중의 적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적은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2차 포에니 전쟁 때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로마를 포위했고,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직접 공격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또 다른 적은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이다. 그들은 아이톨리아 동맹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리스를 점령하려고 했다. 로마는 심각했다. 아직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 없었으며, 로마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한니발이 안티오코스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그 당시 로마의 군주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군인들의 전쟁 피로감, 시민들의 전쟁 염증, 로마나 이탈리아도 아닌 나라 밖 그리스에서 벌어지는 전쟁, 그것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 그리스의 요청에 의한 전쟁 수행...... 이런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대부분은 전쟁을 꺼릴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필리포스와의 전쟁도, 안티오코스와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게다가 거의 동시에 두 전쟁을 수행한다. 그 이유는 지도자들의 공명심, 그리스 문화와 문명에 대한 동경, 로마 귀족들의 야심과 군인들의 승리감 고취 등 다양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요인들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견해를 제시한다. 한니발에게 당한 것처럼 더는 이탈리아 본토 침략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 밖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 주도권을 둘러싸고 아시아와 유럽이 다툰다면, 로마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이다. 로마가 승리한다면 로마가 그리스는 물론이고 아시아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지만, 아시아 세력이 승리한다면 아시아가 그리스와 유럽으로 진출하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 전부 아니면 전무를 다투는 전쟁이라면 미루지 않는 것이 좋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인들이 당면 과제를 시간에 맡기지 않았다고 보았다. 시간은 자신에게 유리할 수도 있지만, 상대방에게 유리할 수도 있다. 시간은 행운도 가져오지만 불운도 가져온다. 시간의 우연에 시민과 나라의 운명을 맡길 것이 아니라 인간과 국가가 운명의 주인이 되어 유리한 방향으로 시간을 통제해야 한다. 그는 현명한 군주라면 로마인들의 이런 시간관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고, 전쟁을 미루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p.119~120
마키아벨리는 로마의 정복 정책과 달리 루이 12세가 정복한 국가 내에 자신과 대적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키우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우선 이탈리아 내부 세력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힘을 키워주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탈리아 외부 세력인 에스파냐의 힘을 강력하게 키워준 것이다. 루이 왕은 결국 이탈리아 안팎의 세력에 밀려 이탈리아 밖으로 쫓겨난다. 여기까지가 마키아벨리가 하는 겉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부분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당연히 학자라면, 아니 관직 한 자리를 차지하고픈 관직 사냥꾼이라면 예상이 들어맞아야 한다. 자신의 진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치 점쟁이가 "자네, 내 말 들으면 곧 성공해"라는 말을 했는데, 그 예언이 적중한 경우와 마찬가지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이탈리아의 통일은 점점 더 요원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점쟁이가 "내 말 안 들으면 곧 망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안 따르는 자가 바로 자신의 자식인 경우다.
마키아벨리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세력 확장을 보고 냉정하게 루이 12세의 잘못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2세와 루이 12세의 나폴리 영토 분할, 그 후 페르난도 2세의 나폴리 독자 지배에 대해선 몸을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나폴리의 몰락은 자신의 분석이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나폴리는 그 후 200년이 훨씬 더 지나서야 에스파냐에서 독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석이 정확할수록 그는 직업을 얻을 가능성이 커지지만, 그 반대로 이탈리아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의 기로에 서 있는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분석이 맞기를 바랐을까, 아니면 틀리기를 바랐을까? 루이 12세의 실책을 통해서 예언 아닌 예언을 해야 하는 그의 심정은 자못 비장했으리라.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이탈리아는 오랜 세월 분열과 혼란에 빠져 유럽의 변방 국가로 전락한다.
p.130-131
루이 12세가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과정은 기가 막힐 정도로 천재적이었다. <당신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것은 어떤 것도 하지 마라>에서 보았듯이, 루이 12세는 샤를 8세의 전철을 밟지 않는 데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했기 때문이다. 또한 루이의 이탈리아 정복은 강력했다. 나폴리를 점령할 때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 12세는 이탈리아 내에 교회와 에스파냐의 힘을 키워준다. 마키아벨리의 견지에서 보면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마름이다. 마름은 주인을 늘 두려워한다. 언제 마름의 지위를 빼앗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름은 기회만 닿는다면 언제든지 주인의 자리를 꿰차고 싶어 한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가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이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국 프랑스는 오래지 않아 이탈리아 밖으로 쫓겨난다.
도움 받은 자가 도움 준 자를 몰아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토사구팽이 바로 그것이다. 도움 받은 자는 도움 준 자를 항상 두려워한다. 도움 준 자가 너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 준 자의 천재성과 힘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도움 준 자에게 잡힌 목숨줄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냥꾼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루이는 그 반대로 했다. 사냥이 끝났는데, 사냥개를 너무 키워주었다. 결국 루이는 사냥개에 의해 잡아먹히게 된다.
질투는 시기심을 낳고, 공포는 두려움을 낳는다. 능가하고 싶은 시기심과 눈 앞에 보이는 두려움이 합쳐지면 그 대상을 제거하고 싶은 음모를 낳게 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점을 국가 간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는 인간사 일반에도 적용되는 지점이다.
p.188
카이사르 등이 보여주는 남성신 비르투스는 선견지명, 결심, 과단성, 단호함, 과감성, 정력 등 다양한 의미이다. 모두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로마 공화정 초기의 군사적 덕목을 강조하는 비르투스이다. 반면에 키케로는 절제, 용기, 지혜, 정의의 기본적인 비르투스에 더해 정직, 관대함, 활수함을 비르투스의 추가 덕목으로 제시한다. 시민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을 강조한 비르투스이다. 키케로 이후 비르투스는 군사적인 의미를 벗어나 도덕적인 덕목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비르투스 덕목은 중세를 유지하는 한 힘으로 작용했다.
마키아벨리는 중세를 지배하던 키케로적 비르투스를 키케로 이전의 남성적이며 군사적인 의미로 전환한다. 그는 고대 로마, 공화정 로마의 비르투스를 다시 불러내 이탈리아에 적용하고자 한다. 그는 이 장에서도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 사보나롤라가 몰락한 이유를 비르투스의 부재, 즉 군사력의 부재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반면에 그는 히에론이 성공한 이유를 군사력을 의미하는 비르투스가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키케로적인 비르투스의 전복! 카이사르적 비르투스의 복원!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일관되게 적용한 사상이다.
마키아벨리는 확실성을 대표하는 남성신 비르투스를 앞세워 불확실성을 대표하는 여성신 포르투나를 정복하라고 권고한다. 이는 고대 로마의 전투적이고 활달한 남성신의 회복을 의미한다. 신흥 군주라면 포르투나보다는 군사적인 비르투스에 의지할 것, 인간이라면 힘에 바탕한 비르투스를 키울 것,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진정한 역량을 갖추는 지침이다.
p.200~201
옛 기득권층에게 새로운 제도와 관습은 기존에 누리던 이익을 침해하는 제도와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군주가 자신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하면, 옛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누리던 이익을 잃지 않으려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백색 테러가 적색 테러보다 훨씬 더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잔인하다.
옛 피지배층은 새로운 제도와 관습으로 당장 이익을 얻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제도와 관습이 낯설고 불편할 뿐이다. 더구나 새로운 제도와 관습이 정착할 것이라는 확신도 하지 못한다. 옛 피지배층은 새로운 제도와 관습이 법을 자기편으로 삼고 있는 옛 지배층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는 것을 숱하게 경험했다. 옛 피지배층은 새로운 제도와 관습이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일 때까지 지지를 미룬다. 이는 인간이 지닌 일반적인 보수적 성향의 한 단면이다.
마키아벨리는 '옛 기득권층의 강력한 저항론'과 '옛 피지배층의 미적지근 지지론'의 이면에 다른 것을 주문한다. 옛 기득권층이 새로운 제도와 관습에 저항한다는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다. 엣 기득권층이 저항한다면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고 확실하게 짓밟아주라고 그는 권고한다. 모세도 수송아지를 만든 유대인 다수를 학살했으며, 로물루스도 자신의 지배에 저항하는 아크론 왕의 종족이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정복했으며, 키루스도 반란을 일으킨 리디아의 남성을 여성화해버렸다. 이렇게 짓밟지 않으면 신생 군주로서 성공하기 쉽지 않다. 보라, 테세우스를! 그가 외지로 떠난 동안 메네테우스는 아테네의 왕이 되지 않았는가!
옛 기득권층의 저항을 확실하게, 공격적으로, 다시는 준동하지 못하게 짓밟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옛 피지배층을 자기편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둘째, 새로운 통치자는 옛 기득권층의 절멸을 통해 새로운 제도와 고나습을 끝까지 실천할 것이라는 확신을 옛 피지배층에게 제공할 수 있다. 셋째, 옛 기득권층의 완전한 제거는 피지배층에게 과거 기득권층이 안겨준 가공할 만한 공포와 두려움을 제거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피지배층은 즉흥적이다. 직접적인 효과가 눈에 보이면 따르지만, 말로만 개혁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 피지배계층은 과거의 기득권층이 처참하게 유린당할 때까지 새로운 군주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옛 기득권층이 완전하고 확실하게 제거되었다고 생각할 때 피지배층은 새로운 군주에게 지지를 표명한다. 따라서 군주는 새로운 제도와 관습을 실행할 경우, 우선적으로 옛 기득권층을 압살하는 화려한 쇼를 연출하여 믿지 않는 피지배계층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추론을 통해 이해해야만 하는 생략된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마키아벨리는 왜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 순서로 언급하는가? 시간의 흐름으로 본다면 실존 인물인 키루스가 가장 마지막에 거론되어야 하며, 테세우스는 반신반인이고 그리스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로물루스보다 앞에 거론되어야 한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업적의 성과에 따라 순서를 정한 듯하다.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의 순서로 업정치적으로 성공한 예이고 테세우스는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정치인으로 마키아벨리는 본 듯하다. 테세우스는 말년에 권력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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