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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파견자들

by Diligejy 2024. 1. 13.

 

'나'라는 존재에 대해 묻는다고 이 책의 표지에는 광고하고 있지만, 나는 그런 고차원적인 것보다 단순하지만 어려운 '사랑'에 대한 질문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이제프의 사랑은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맞다면 왜 맞고 아니라면 왜 아닌 것일까?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마 이제프가 가진 순수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는 범람이 된 아이인 태린을 끝까지 보호했고, 태린이 정말 순수한 곳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걸 바친다. 심지어 태린에게 목숨까지 내준다.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이제프가 가진 순수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는 범람이 된 아이인 태린만을 끝까지 보호했고, 태린이 정말 순수한 곳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다른 범람된 사람들을 희생한다. 심지어 태린에게 살해된다.

 

같은 사실에 대해 두 개의 화해할 수 없는 관점이 존재한다. 0.1밀리조차도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관점은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흔히 '순수한' 사랑이라는 얘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쓴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순수라는 관념만큼 위험한 건 없다고. 순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궤변같지만 그런것 같다고. 

 

어떻게 생각할지는 소설을 읽은 사람의 몫이지만, 작가의 질문은 묵직해서 한동안 떠나지 않을 것이다.

 

 

p.143

시간이 배수관을 막은 끈끈한 점액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p.182-183

너희는 이미 수많은 개체의 총합. 하나의 개체로는 너희를 설명할 수 없어. 네 안에는 다른 생물들이 잔뜩 살고 있어.

 

'미생물들을 말하는 거야? 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 의존해 살 뿐이지, 나와 이어져 있는 건 아니야. 내가 의식하는 나라는 개체는 단 하나인걸.'

 

그 존재들은 너와 같이 살 뿐만 아니라, 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의식이야말로 주관적 감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혼란스러웠다. 그들이 규정하는 의식과 태린이 규정하는 의식은 너무 달랐다. 태린의 생애에서 '자아'란 흔들린 적 없는 굳건한 개념이었다. 미생물이나 기생충 같은 것들이 인간에게 붙어 산다고 해도 그것들이 의식을 갖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것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태린에게 붙어 있고, 때로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영혼과는 구분되는 외부의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생각마저 읽어버린 것처럼, 그것들이 다시 속삭였다.

 

잘 생각해봐. 네가 정말로 하나의 존재인지......

 

p.209

진심은 아니었다. 사실은 쏠을 원망했다. 쏠이 아니었다면 태린은 무사히 파견자가 되어서 이제프와 함께했을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임무에 떠밀리듯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 태린이 처한 상황, 어떤 부분은 태린 자신의 선택이었다. 쏠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었다. 쏠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 쏠이 태린의 몸을 움직이도록 허락해준 것, 감각 체계를 공유한 것, 위험한 임무에 오기로 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로 돌아가지 않고 그 미지의 진동을 따라온 것. 그것들은 태린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태린은 쏠을 원망하는 대신 이해하고 싶었다. 쏠이 느끼는 혼란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혼란스러움은, 태린이 이곳에서 늪인을 마주한 이후로 계속해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으니까. 늪인들의 모습은 분명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는 어딘지 모를 익숙함이 있었다. 그들에 대해 느끼는 알 수 없는 친밀감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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