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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러시아소설

죄와 벌, 몰락하는 자의 뒷모습

by Diligejy 2017. 12. 7.

p.10~11

윤리적인 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윤리적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을 뜻할까? 이타적인 삶, 사회에 선한 일을 하는 삶, 희생하는 삶 ......  도스토옙스키라면 이런 답들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쯤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윤리란 남을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을 생각하는 데에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이 아니라, 사회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심사숙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사회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다.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내가 가장 고양되는 순간을 탐구하고, 그럼으로써 내가 변신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 그게 무엇보다 윤리적인 삶이다. 왜냐고? 왜 그게 방종이 아니라 윤리적인 삶이냐고? 부정어법으로 대답해보련다.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복무하는 삶이라는 것은 도무지 윤리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와 삶과 인간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거치지 않은 채로 다만 피상적으로 선험적 '명령'을 따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부정한다 해도 자신의 사유의 게으름과 신체적 안온함에의 추구를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의 안락함을 위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묻지 않는데, 이것이 어떻게 윤리적인 삶인가? 남들이 시키는 대로 고여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삶이 어떻게 윤리적이란 말인가?


p.12~13

스스로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어 열병과 착란에 빠지는 인간,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변태(變態)를 겪는 인간은 언제나 문학적이고 매혹적이기 마련이다.


p.23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페테르부르크는 완연한 유럽 도시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양식의 건축물이 세워지고 잘 닦인 도로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이곳은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의해 계획되고 창조된 꿈의 도시, 서구 근대문명의 총화다. 하지만 다른 유럽인들 눈에 그것은 혼종 괴물이었다. 왜냐하면 페테르부르크는 다른 유서 깊은 도시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역사의 숨결을 마구잡이로 욱여넣어 만든 이상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도, 종교개혁도 경험하지 못한 러시아에 르네상스 문화와 바로크 문화와 로코코 문화 등등이 새겨진 유럽 양식이 한꺼번에 들어와버렸으니!


p.28

페테르부르크 거리는 온통 관료 제복을 걸친 사람들로 득시글했다. 그중 태반이 일용직 노동자들이 받는 품삯 수준의 봉급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하급관리였으며, 그나마도 자주 실직상태가 되었다. 관리라고 떠벌리고 다니기야 하지만 이들의 삶은 언제든 나락에 떨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골의 '외투' 속 주인공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삶도 그렇다. 만년 9급 관리로서 매일같이 글자를 베껴 쓰는 일을 하는 그가 소설 말미에서 사라지고 나자 그 자리는 빠르게 다른 인력으로 대체된다. 누구든 대체 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이 도스토옙스키와 고골의 사람들이었고 실제 페테르부르크를 차지한 많은 남성들이었다.


p.69

지옥은 회개한 천사가 아니라 더 악랄하게 비틀린 괴물이 생산되는 곳이 아닐까?


p.71~72

세계가 감옥임을 꺠닫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들의 행보는 놀랍도록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일찌감치 세계가 감옥임을 알았던 햄릿은 남들을 죽이고 그 자신까지 죽이기에 이르렀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죄 있는 자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무릎쓰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죽기 혹은 죽이기 - 그것이 일종의 메타포라 해도, 여기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자신이 수인임을 깨달아버린 자는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대개 커다란 위험과 영원한 작별인사를 가지고 온다는 것, 그것을 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감옥의 묵운 공기에 짓눌린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뿐이다. 감옥 바깥을 꿈꾸는 수인은 언제나 모종의 죽음을 끌어오려 한다. 세계를 숨막히는 감옥으로 만든 것들을 향해 칼이든 도끼든 겨눠야 하는 것이다. 바깥으로부터 부과된 법과 도덕률, 홀린 채 그것을 따르며 신음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는 한 결코 감옥의 창살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가족과 친구를 다 버리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누군가는 머리를 깎은 뒤 출가를 하고, 누군가는 학교나 회사를 그만두고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살인자의 길을 걷는다. 드디어 이니셜이나 죄수번호가 아니라 제대로 이름 붙은 사내가 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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