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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종횡무진 역사(4)

by Diligejy 2015. 10. 2.

 


종횡무진 역사

저자
남경태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14-07-2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동양사와 서양사, 시사와 역사가 한눈에!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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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3

북조의 가장 큰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북위의 효문제다. 그는 우선 도읍을 한족 왕조들의 전통적 수도인 뤄양으로 옮겨 적극적인 한화漢化정책을 예고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성을 중국식의 원元으로 바꾸었으며, 복식과 제도, 의식, 풍습 등도 중국식으로 개혁했다. 무엇보다도 최대의 개혁은 균전제均田制다. 485년에 한족 관료인 이안세李安世의 건의로 실시된 균전제는 모든 토지를 국가의 소유로 규정하고 국가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급해 먹고살게 하면서 일정한 비율의 조세를 수취한다는 제도다. 지금 보면 특별한 내용은 아니지만 균전제의 역사적 의의는 컸다. 우선 사실상 최초의 토지제도라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또한 내용적으로는 토지의 공유 혹은 국유라는 관념을 제도화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후 중국과 한반도, 일본의 모든 왕조는 지배층, 즉 왕실이 전국의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분급해 과세하는 방식이 기본 노선으로 자리 잡게 된다.

왕조시대에 국가 경제를 그렇게 운용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듯하지만, 서양에는 애초에 그런 관념이 없었다. 고대 로마나 중세 유럽에서는 나라의 모든 토지를 중앙에서 소유하고 통괄적으로 관리하는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다. 앞서 보았듯이, 로마 황제도 제국의 오너가 아닐 뿐더러, 나중에 보듯이 중세 유럽의 군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중세 유럽에서는 토지의 분급이 '과세'를 중점으로 삼는 동양식이 아니라 토지 소유권 자체를 내주는 '분봉'의 형식을 취했다.

 

p.124~125

삼국시대의 오와 동진, 그리고 남조의 네 나라를 합쳐 흔히 육조六朝라고 부른다.. 육조시대에 발달한 귀족 문화는 동양의 르네상스라 할만큼 다채롭고 화려했다(시대적으로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1000년이나 앞서니까 오히려 르네상스를 '서양의 육조시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문인과 화가가 등장해 창작과 비평을 활발하게 전개했으며, 그때까지 전인미답의 지경이던 예술 이론을 확립했다.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 회화의 사조인 고개지顧愷之,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사령운謝靈運 등이 모두 육조시대의 예술가들이다. 이 시기에 확립된 문학과 예술의 기본 골격은 이후 당에 계승되어 당 문학을 중국 시문학의 최고봉으로 올려놓는 역할을 했다.

불교가 도입된 것도 바로 육조시대의 일이다. 당시에는 분열기에 걸맞게 난세의 사상인 도교가 성행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신흥 종교인 불교도 노장사상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러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듯이 점차 불교는 도교를 누르고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불교는 동진에서 크게 성행했고, 남북조시대에는 귀족들만이 아니라 서민들의 마음속에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한반도 왕조들에 불교가 전래된 것도 이 시기다. 371년에는 북조의 전진이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고, 384년에는 남조의 동진이 백제에 전했다(신라는 한참 뒤인 528년에 고구려에서 불교를 수입했다).

 

중국과 한반도는 묘한 역사적 접점을 가진다. 중국 대륙이 분열기를 맞을 때마다 한반도 사회는 변화와 발전을 겪었으며, 반대로 중국에 강력한 통일 제국이 들어서면 한반도는 제국에 복속되어 침체기를 맞았다. 1차 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에는 한반도의 기록된 역사가 전하지 않지만, 2차 분열기인 위진남북조시대에는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여러 왕조가 활발히 성장하고 번영했다. 수-당의 통일 제국이 중국을 지배한 7~10세기에

한반도 사회는 중국의 핵우산 속에서 안정을 이루기는 했어도 특별한 발전은 없었다. 당이 무너진 10세기에 한반도는 후삼국시대로 접어들어 소규모 국제사회를 이루면서 독자적인 변화의 조짐을 보였으나 중국이 송으로 통일된 11세기부터는 다시 중화 세계의 영향권에 편입되어야 헀다. 이후 한반도 왕조들은 중국의 통일 왕조와 보조를 맞추어 부침을 거듭했다.

 

p.134

무엇보다 균전제는 영토의 개념이 명확히 확립되지 않으면 생각할 수도 없고, 시행할 수도 없는 토지제도다. 토지의 전체 면적이 확정되어야 농민들에게 분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균전제를 채택했다는 것은 곧 당 제국이 영토국가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국가라면 당연히 영토국가가 아닐까? 지금의 관점에서는 그렇지만 역사상 영토국가가 탄생한 맥락은 그렇지 않다. 특히 유럽의 경우는 중세를 거쳐 종교전쟁이 끝나고 17세기에 이르러서야 확고한 영토국가가 생겨난다. 이 점에서 중국은 유럽과 크게 대비된다. 동양과 서양은 국가의 개념부터 달랐던 것이다.

 

p.135

율령과 과거제, 그리고 균전제는 모두 당이 통일 제국이었기에 가능한 제도들이다. 이런 제도 정비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국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고 나면 군인과 정치가보다 행정가가 필요하고,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정 구조의 확립이 시급하다. 전자를 담당한 것이 율령과 과거제이고, 후자를 담당한 것이 균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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