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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글/자기발견

어떻게든 살아가야해 울면서 가든 기어서 가든

by Diligejy 2019. 12. 6.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격변이 일어났고 우리는 폐허 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자그마한 보금자리를 새로 짓고 자그마한 희망을 새로 품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좀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가든지 기어 넘어가든지 한다.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자소서를 봐주고 면접을 볼 때 조금 도움을 준 형이 하이닉스에 이어 대한항공에도 합격했다. 이제 이 형은 정말 어렵고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 하이닉스를 가느냐 아니면 대한항공을 가느냐.

남들이 보기엔 배부른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기업은 기업문화나 직무, 근무지 등 모든 게 다르다. 선택에 따라 삶의 흐름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참고로 이 형은 서울대 통계학과를 졸업했다. 

이 얘기를 들은 당신의 반응이 궁금하다. 

'서울대니까 그것도 취업깡패 통계학과니까 합격한 거 아니야? 뭘 대단한 걸 해줬다고'라고 반응할 지도 모르겠다. 뒤에 뭘 대단한 걸 해줬다고 까진 아니더라도 '서울대니까', '통계학과니까', '서울대 통계학과니까' 라는 반응은 많이 들었다.

물론 입장바꿔보면 나도 순간적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형의 취업준비과정을 돕고 지켜본 입장으로서 말할 수 있다. '서울대'라서' 합격했다기보단, 서울대'에다' 자소서도 잘 쓰고 면접도 잘 봐서 합격했다고 하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해석이라고. 

물론 내 역할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친한 동생으로서 오지랖 몇 번 떨었을 뿐이다. 이 형의 엄청난 노력과 행운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정치컨설턴트 박성민 대표는 "10% 컨설팅 해주고 90%는 컨설팅을 받고요. 저희가 캠페인을 돕지만, 안될 사람 되게 만들 재주가 없습니다. 최대한 있는 재주가 될 사람 안 떨어뜨리는 정도의 재주. 그래서 컨설턴트 최고의 자질은 줄 잘 서는 것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724463.html#csidx84d4241417498179f5f30b4288752eb

 

잠재력의 척도는 ‘지도자·혁신·공적’ 이미지

정치BAR_‘김보협의 더정치’ 4회 텍스트야당의 분열

www.hani.co.kr

컨설팅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컨설팅은 안 될 사람을 되게 해주는 게 아니다. 될 사람 안 떨어뜨리는 게 최선이다. 결국 실행은 본인/조직이 하는 거기 때문이다. 

이 형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자소서를 보면 형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막막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하반기 취준이 처음으로 취준하는 거니까...

엄청난 길이의 복문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정독해야만 했다. '저는'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가서 거슬렸다. 직무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소제목도 없었다. 심각했다. 

이 형 과연 자소서 잘 쓸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보통 자소서 컨펌 봐줘도 바뀌진 않고 대충 맘에 드는 것 몇 개만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친한 형이니까 빨간펜 선생님처럼 하나하나 다 고쳐주고 잔소리를 해댔다. 단문쓰기 연습부터 하나하나 시켰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템플릿이 될 만한 자소서를 만들어주었다. 형 방에 놀러가서 밥 얻어먹고 침대에 누워서 잔소리하면 형은 그걸 받아들고 고쳤다. 

대기업 자소서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1개 기업을 쓰는 것조차도 진이 빠진다. 기업마다 다르지만 적으면 2천자 많으면 5천자를 써야 한다. 가끔은 지원자를 개무시하는 듯한 질문에도 답을 적어내야 한다. 그걸 지독하게 반복하는 일이다.  형은 20개가 넘게 썼다고 했다. 대충 평균 내서 3천자로 잡아도 6만자를 넘게 썼다는 얘기다. 물론 기본 템플릿까지 맞춰준 이후에는 별로 컨펌봐주지 않았다. 가끔 놀러가면 봐주거나 카톡 혹은 전화로 봐준 정도다. 본인이 알아서 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굳이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서류 통과한 몇몇 곳을 대비하기 위해 면접 스터디를 했다. 다른 곳 지원에 맞춰 자소서를 썼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독히 빡센 일정이었다. 형은 합창단 모임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형이기에 그 일정은 따로 하고 말이다. 

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바빠서 알바를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정신없이 하루하루 버텨내는 분들도 있다는 걸. 그런 사례는 제외하고 하는 얘기다. 

내가 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이가 꽤 있는 편이다. 어리지 않다. 경력도 엄청 화려하진 않다. 다른 약점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뚫어냈다.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다. 서울대라는 advantage는 분명 존재하지만, 서울대라서 통과하는 건 아니란거. 취업깡패라는 서울대 통계학과도 예외는 없다. 

다른 형에게 이 사례를 얘기하며 "형, 형도 내가 자소서 컨펌 봐줄테니까 빨리 여기저기 써서 보내줘"라고 말했다. 그 형은 "민수(가명)는 서울대잖아"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자소서를 보내지 않았다. 예전에 그 형의 자소서를 봤을 때 아직 갈길이 멀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 형에게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바뀌지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운7기3이라는 걸 믿는 인간이다. 운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취준을 1번 했는데 대기업 2곳에 떡하니 붙은 건 형의 노55555555555555력 보다도 학벌과 운빨이 더 작용했다고 믿는다. 

구직은 합격을 향하는 게임이 아니라 불합격을 피하는 게임이다. 취준생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불합격 확률을 줄이는 것뿐이다. 그 점에서 형은 혹시 모를 불합격을 피해가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날개를 조금 더 펼 수 있을 듯 하다. 쉽지 않았다.

고생 많았어요 형.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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