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우(가명)야 쿠폰 모으러가자"
"그래 진영아"
우리가 살던 곳 근처에 새로운 PC방에서 집집마다 1시간 쿠폰을 뿌렸다. 우린 그걸 모으러 다녔다. 대교에서 학습지 홍보차원에서 홍보물과 샤프를 집집마다 뿌렸는데 그것도 모으고 다녔다.
우리가 왜 친해졌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친할 뿐이다. 너무 당연한 공리니까. 따지고보면 우린 동창도 아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다른곳을 나왔으니까. 냉정히 얘기하면 학원을 같이 다닌 사이. 그런 사이다.
우리는 비슷했다. 촌도시 중에서도 구도심 달동네에 살았다. 어렸을적엔 몰랐지만 크고보니 알게되었다. 둘 다 이리저리 모자라고 상처가 많았다. 장남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했고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버티는 연습을 많이 해야했다.
병우에겐 할머니가 계셨다. 병우와 병우의 누나와 셋이 살았다. 하지만 병우의 누나는 늘 바빴으므로 병우는 거의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병우 할머니가 북대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중학생 때는 용돈을 받지 못했기에 요구르트를 사들고 갔다. 병우와 할머님은 와준거만으로도 고맙다며 사양했다. 그리고 몇 년전 할머님은 돌아가셨다고 했다. 병우는 그 사실을 내게 알리지 않았다. 왜 알리지 않았냐는 질문에 "너도 힘들잖아 뭣하러 알려"라고 답했다.
병우는 생활력이 강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했다. 배고프면 스스로 요리도 만들어 먹었다. 병우를 볼 때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힘들지만 병우는 자기나름대로 인생을 꾸려나갔다.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은 병우와 다른 친구들을 보며 길러온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수원에서 폐인처럼 지낼때 병우는 수원으로 올라와 중환자실 면회를 같이 가고 삼겹살을 사줬다. 면목없지만 받아들이고 얻어먹었다.
멍때리며 촛점이 흐려진 내게 위로를 건넸다. 그 때 나이를 먹었다는걸 느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나와 병우 모두 졸업을 했고 병우는 일찍 취직한 뒤 우리는 만날 수 있는 날을 기약하며 서로 각자의 일을 하고있었다. 병우는 광주에서 나는 서울에서, 각자 타지에서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렸을적 같이 동네를 돌아다니던 꼬맹이에서 밥벌이를 해야하는 아저씨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 만나고 싶지만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을 뿐, 그 이상 만날 수 없었다. 내가 전주가는걸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어제 복싱장에서 줄넘기를 하고 헥헥거리며 잠시 쉬고있는데 병우에게 문자를 받았다. 부고소식이었다. 할머님은 돌아가시기 한참 전 부터 지병을 앓고 계셨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아버님에 대한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뭘까. 진짜일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친 목소리였지만 평소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병우는 내게 부고소식을 전했다. 아버님은 갑자기 회사에서 쓰러지셨고 관리실에서 발견했다고 병우는 말했다. 이 말 속에서 병우의 감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확신할 순 없지만 느낌이 왔다. 응축되고 있구나. 극도의 혼란과 슬픔이 혼재한 그 상황에서 이 녀석은 슬픔을 감추고 모아두기로 했구나.
언젠가는 넘쳐흐를 슬픔일텐데 어떻게 버틸지 걱정되었다. 병우는 서울에서 일하기 바쁠텐데 굳이 전주까지 올 필요 없다며 전화로 충분하다고 했다.
이 말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갈거니까. 갑작스레 일정변경하는거라 힘들긴 하겠지만 병우의 삶에서 힘든 지점에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연차를 쓸지 리모트 웍을 할지 타임 시프트를 쓸지를 놓고 얘기하고 협상한 결과 타임시프트를 쓰기로 결정했다. 뭐 주말에 좀 더 일하면 될 뿐이니 신경쓰이지 않았다. 영어논문발표가 조금 걱정되었지만 한글로 발표해도 허접한 수준인건 매한가지.
12시까지 일하고 집에 걸어서 퇴근하니 1시, 씻고 빨래하고 잡일하니 2시. 채팅좀 하니 3시가 가까워졌다. 목표는 5시 반에 일어나 7시까지 회사출근하고 조금이따 바로 조문가기. 요 몇일 계속 야근했는데 더 빡빡한 일정이었다. 요새 아침일찍 일어나본 적이 없어 과연 제 시간에 갈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일어나는 건 성공. 하지만 멍때리다가 8시에 회사출근. 이것저것좀 한뒤 내려갔다.
식장에 도착하자 공기가 달라졌다. 무거운 기압.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이라면 알만 한 무거운 기압이었다. 모니터 화면에 상주 : 김병우라고 써있었다. 저 글자의 무게감을 알 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병우와 만났다. 평소에 짓던 표정 그대로 반겨주었다. 그런 모습이 더욱 슬픔을 자아냈다. 차라리 흐느껴 울기라도 해주면 후련하련만, 병우는 내색하지 않았다.
향을 피우고 아버님께 절을 드린뒤, 상주인 병우와 병우누나에게 절을 드렸다. 병우와 내가 서로에게 절을 한다는게 믿을 수 없었다.
평일 점심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화환은 가득했다. 병우가 제조업 일을 해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화환을 보내왔다.
점심을 간단히 먹으며 대화하려는데 병우는 입관식을 가야한다며 조문객을 담당해달라고 부탁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알겠다고 했다.
병우가족이 입관식 간지 몇분도 안되서 조문객이 찾아왔다. 당연히 상주가 어딨는지 물었고 입관식을 갔기에 기다려달라고 부탁드렸다. 급한 일이 있으신건지 원래 급하신건지 모를 분 한 분은 언제 오냐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동료분들이 달래며 기다리자고 했다. 다른 조문객들도 비슷했다. 식사를 대접하며 기다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상주없는 1시간은 눈치보고 달래며 무서운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병우가 돌아왔다. 원불교집안인 병우집안에 맞게 원불교의식이 진행되었다. 그 의식에서 나온 언어와 법문 성가는 죽음이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듣다보니 슬픈 마음이 올라와 견디기 힘들었다. 참고 버텼다.
그렇게 일 좀 돕다보니 올라갈 시간이 되었다. 병우가 배웅해주었는데 시덥잖은 유머를 구사하며 웃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슬퍼해도 괜찮은데.. 마음이 쓰렸다.
마지막 악수를 하며 눈을 쳐다봤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거였다.
터미널로 향하는 택시에서 장례를 마치고나면 병우가 충분히 슬퍼하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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