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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글/자기발견

마음의 빚을 조금씩 덜어보려 해.

by Diligejy 2020. 1. 19.

갑자기 사고가 터진 후 수원 아주대병원으로 가야 했을 때 막막했다. 
당장 어디서 먹고 자고 입어야할지,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되지 않았다.
내게 있는 거라곤 꼴랑 정장 한 벌, 외투 한 벌, 몸뚱아리 하나, 끝.

이게 전부였다.

외상센터 1층에서 대기하며 고심했다.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기 힘든 문제였다. 
하염없이 연락처 목록만 뒤져볼 뿐 답은 나오질 않았다.

그 때 떠올랐던 아주대에서 자취하고 있는 부랄친구... 

연락처를 눌렀다.

유민우(가명) 010-xxxx-xxxx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망설여졌다. 너무 미안했다. 아무리 부랄친구사이라지만 이건 너무 민폐였다. 

하지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당시 큰삼촌댁에 몇 일간 얹혀지냈는데, 평소에 별로 친하지 않은 큰삼촌네에 얹혀사는 건 부담스럽고 거리도 꽤 멀어 불편했다.

전화를 걸었다. 

"민우야, 잘 지내? 뭐하고 있어?"
"어 진영아, 아빠랑 같이 제주도에 왔어. 무슨 일이야?"
"어... 그게 사실 이런이런 일이 있었어."
"뭐? 뭐라고? 뭔 소리야?"
"그렇게 되었어. 민우야 미안하지만, 너희 집에 좀 머물러도 될까?"
"그래. 어디어디 보면 키 있으니까 지금 바로 가서 쉬어. 룸메이트 형은 집에 갔으니까 편하게 있어도 돼."
"미안해."
"뭐가 미안해. 이따가 수원 가서 얘기하자. 지금 산행중이라."
"그래. 고마워."

염치 없지만 친구네 집에 가서 보일러를 틀고 침대에 누워 쉬었다. 긴장이 식은땀으로, 피곤함은 울음으로 배출되며 덜덜 떨었다. 그렇게 잠에 들었다.

중환자실에서의 면회시간은 오전 오후 각각 20분이 전부였다. 그 외의 시간에 법률, 보험 관련 일들을 공부하고 처리하거나 얘기하고 사람들과 싸우는 게 내 일이었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나갈 일이 딱히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방에 있는데 전화가 왔다. 

"진영아 바쁘냐?"
"아니, 면회갔다가 오면 그닥 할 일 없어. 무슨 일이야?"
"친구들 모여 있는데 소개시켜줄게. 여기 꼬치집으로 와."

이런 식으로 민우는 아주대 선배, 친구, 후배들을 내게 소개시켜주었다. 룸메이트 황대우(가명) 형도 소개시켜주었다. 대우형은 힘들어하는 내게 츤데레처럼 무심한 듯하면서도 살뜰히 챙겨주며 많이 힘이 되주었다. 

매일같이 식칼을 들고 그어 말어를 고민했던 시기였고 트라우마였던 시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친구들이 있어준 인복이 있었기에 가끔 행복을 느꼈다.

대우형도 취준을 빡세게 했고 삼성전자에 들어갔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도 공무원도 되고, 부동산투자회사에도 들어가고 잘 풀렸다고 했다. 감사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어찌저찌해서 서울에 올라온 나는 취준을 하는 동안 취직을 하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워서 민우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은 부랄친구들끼리 뭐가 부끄럽냐고 질책했지만 나는 뭔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회사에 입사한지 2달이 넘은 지금에서야 민우와 족발집으로 갔다. 

민우는 예쁜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고 집안도 화목하며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민우의 광대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니 우울해서 아무것도 못하던 마음에 빛이 들었다. 민우의 행복이 오래갔으면 하고 소망했다.

민우에게 명함을 주었다. 

좀 더 일찍 주고 싶었다. 아니 몇 년 전에 이미 주었어야 했다. 늦었지만 이제서라도 주었다. 민우는 자기 회사와 가깝다며 자주 보자고 했다.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민우는 지금 여자친구가 너무 좋아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여자친구의 사진을 보여주며 3분정도 자랑을 했다. 민우와 내 얼굴은 어렸을 적 몰려다니며 게임을 하던 그 시절 그대로인거 같은데, 결혼을 얘기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민우가 행복해하며 결혼을 얘기하기에 웃으며 그러길 바란다고 말했다.

족발으로 시작한 대화가 김치찌개와 계란찜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미 내가 낼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바로 계산했다. 민우가 막았다.

"힘들 때 도와줬었잖아. 고마웠어 민우야."라고 민우에게 말했다.

아직 전부 다 던 건 아니지만, 마음의 빚을 조금 던 거 같다. 취직해서 좋은 점이다. 돈을 조금 더 벌고 싶다. 아직 갚아야할 빚들이 많이 쌓여있다. 어쩌면 내 삶은 다른 분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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