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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붓다의 치명적 농담(2)

by Diligejy 2015. 10. 31.

p.108

이 모든 일의 관건은 삶의 이 실상, 그 고통과 비참과 직접 '대면'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변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삶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남다른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붓다는 이 어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화살을 열 번 날려 과녁에 맞추기는 어렵다. 백 번 날려 다 맞추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 삶의 비참한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붓다는, 놀랍게도, 사성제 가운데 처음의 고苦의 진리를 깨닫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p.120~121

이 '세계世界'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굳이 따지자면, 이 세계는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또 그 안에서 울고 웃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없으니',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마음'을 통해 얽은 가건물일 뿐, 객관적 물질성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양면성과 가변성이 불교의 불가해한 역설과 휘황한 변증을 가능하게 한 진원지입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가 있는 걸까요. 사람 수만큼 있겠지요. 불교는 대체로 여섯 개가 있다고 합니다. 육도六途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에 살고, 어떤 사람은 짐승처럼 살며, 어떤 사람은 아귀처럼 삽니다. 어떤 사람은 아수라처럼 싸우고, 어떤 사람은 예외적으로 훌쩍 신선으로 축복받은 삶을 누립니다. 이들은 극단적 케이스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때로 기쁘고 때로 슬프며, 때로 즐겁고 때로 비참하며, 그래도 사람 노릇을 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세人間世'의 장삼이사들입니다.

 

불교는 이 '욕망의 세계欲界'를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합니다. 짐승이라면 사람 노릇하라고 권하고, 사람이라면 신선이 되라고 권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불교는 신선도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다른 행복의 철학과는 좀 다릅니다. 신선들은 육체의 제약이 적고 장수한다는 점에서 분명 인간세보다 나아 보이나, 그 축복은 공덕이 다하면 언젠가는 다시 하급의 윤회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아예 이 윤회의 바퀴를 영원히 떠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금강경]도 설파하고 있습니다. 불도佛道를 통해 '삶의 물길이 바뀌면豫流' 처음에는 '한번만 더 윤회했다가一來' '더 이상 윤회하지 않다가不來' 마침내 '이 사바의 곤경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아라한의 삶을 살게 된다고 말입니다.

 

p.131

"망계妄計로 인한 집착인 게지,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다니. 마음속 의심이 곧 암귀暗鬼가 되고, 눈에 병이 들면, 없는 꽃이 허공에 어지럽지. 풍경은 하나인데, 세 사람이 보는 것이 왜 이렇게 서로 다를까. 이 비밀을 깨달으면 이름 혹은 세계가 부실하다는 것을 알 거야. 그럼, 백우거白牛車를 유유히 끌 텐데."

 

p.135

금강경이 그래서 말합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유명한 사구게四句偈를 친절하게 제 멋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그것들은 객관적 실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네 사적 의지와 관심의 투영, 다시 말해 '너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 사태를 선명히 자각할 때, 그 때 너는 붓다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p.136~137

무명無明이라, 요컨대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뭘 하고 사는지도 잘 모릅니다. 이게 아이러니 중에서도 아이러니 아닙니까.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이들을 용서하소서.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모르나이다." 붓다나 예수뿐만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무지야말로 근원적 죄악이라고 갈파했습니다. 기원전 100년 무렵, 승려 나가세나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다스리던 박트리아 왕 메난드로스에게,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리스의 왕에게 그는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뻘겋게 단 쇳덩이를 어느 사나이는 모르고 잡았고, 또 한 사람은 알고 잡았다고 할 때, 누가 더 많이 데겠습니까." "존자여, 모르고 잡은 사람이 더 데겠지요." "대왕이시여, 그와 마찬가지로 모르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죄가 더 큰 것입니다."

 

원효가 무덤 속에서 해골바가지물을 먹고 나서 깨달은 것, 그것은 바로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결국, 자기가 만든 세계"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 바로 그 근본 사실 하나입니다.

 

p.138

세계를 만든 것도 '마음'이고,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것도 마음입니다. 혁명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하는 것. [법구경法句經]의 첫머리를 정대 공양頂戴 供養합니다.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법정 역, [진리의 말씀], 나무심는사람, 1999, 14쪽)

 

p.148

우리의 모든 분별分別, vikalpa은 결국, 자신의 관심의 투사project일 뿐입니다. 그러니, 객관적일 수가 없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이처럼 자기 관심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왈,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것입니다.

 

p.151~152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합니다! 공空이 무아無我와 동의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이참에 말인데, 제발 공을 설하면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아원자 세계의 내부 공간의 휑한 공간 운운하는 논법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씀은 불교의 적절한 이해를 심각하게 그르칩니다.

 

불교가 공空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객관적세계法界는 '거기 그렇게眞如, 혹은 如如' 역력歷歷하게 존재합니다. 불교는 다만 그것이 '자아의 투사로 물든染 주관적 세계我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할 뿐입니다. 이 구분을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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