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
경허 대사가 일찍이 말했다.
그 뜻을 얻으면 거리의 잡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에서 헤매면 용궁의 보배곳간도 한바탕 잠꼬대일 뿐이다.
p.20
요컨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아직 불교가 아니다. 대신에, "내가 본 진실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곳에 불교가 있다.
p.24
가르침이란 본시 내 속에 있던 어떤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는, 선가의 말을 빌리면
'지시指示'일 뿐입니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의발을 찾아 천리 먼 길을 쫓아온 혜명에게 육조 혜능 스님은 분명히 일렀습니다. "비밀은 이미 너에게 있다."
p.32
방편적으로도 <금강경>은 문자를 '통한' 불교와, 문자를 '떠난' 불교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교敎와 선禪의 접점이 바로 이 경전입니다. 이 경전이 대승의 중심이면서 선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기도 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선에 무슨 소의경전이 있는가 하는 분도 있겠군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데 말입니다.
p.50~51
왜 이 경의 이름에 '금강반야바라밀'을 붙였는가. 금강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다. 그 특성은 지극히 날카로워 온갖 물건을 다 부순다. 금강이 지극히 견고하다고는 하나 영양각이 깰 수 있다. 여기 금강은 '불성'에, 그리고 영양각은 '번뇌'에 비유된다. 요컨대 금강이 비록 견고하나, 영양각이 능히 부수듯, 불성이 비록 견고하나 번뇌가 능히 교란시킬 수 있다. 번뇌가 비록 견고하지만, 그러나 반야지가 능히 깨부술 수 있다. 이는 영양각이 비록 단단하나 빈철이 깨부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셋의 서로 물린)이치를 깨닫는 자, 불성을 선명히 이해했다 하겠다.
p.51~52
우리 각자는 크고 작은 삶의 굴곡을 거치며 때로 절망적 고통과 부당한 악의를 거쳐 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지 않을까요. 이런 불리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인간은 늘 자신의 본래 힘과 존엄을 '회복'해나가는 '기적'을 연출합니다. 나아가, 시련을 거치면서 그는 오히려 더 깊고 형형한 안목을 지니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공동 운명으로 돌아보게 되지요. 불성이란 다름 아니라, 이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적들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회복'하며, 동시에 '성장'하는 그 불가사의한 힘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힘은 우리 모두가, 누구나 예외없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p.54
돈교頓敎는 이런 타성적 '엄숙주의'에 대한, 그리고 이런 '점진주의'에 대한 벽력같은 고함 소리로 출발했습니다. 돈교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 너머에, 깨달음이니, 구원이니, 법계니, 정토니가 결코 없다는 사자후입니다. 돈교는 지금 있는 그대로, 여러분 자신이 바로 '절대'임을 그토록 간절히, 친절하게 일깨워주려 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왈, "깨달을 바도, 얻을 바도, 설할 바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눈을 들어 '쳐다보라'고만 했습니다.
p.55
그게 전부라면, 우리는 따로 '의도적으로'할 일도 없고, 따라서 '성취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남도 또한 '이 모두'를 이미 갖고 있으니, 새삼 설파해줄 것도 없습니다.
p.57~58
요컨대 불교의 기획은 '불성'과 '번뇌', 그리고 '반야'의 삼각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육조 혜능은 이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비유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금은 산중에 있다. 그러나 산은 제 속에 이런 보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보물도 이게 산인 줄 모른다. 왜냐 불성佛性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불성이 있어, 그 보물을 이용한다. 금의 전문가를 만나 산을 뚫고 깨서, 광속을 캐내, 그것을 제련하여, 순금을 얻어, 이것을 자유롭게 처분하여 가난과 궁상을 면한다. 사대四大로 된 우리 몸 안에 있는 '불성' 또한 그러하다. 여기 '몸身'은 세계世界에, 인아人我는 산山에, 번뇌는 광석찌끼에, 불성은 금에, 지혜는 제련공 工匠에, 정진용맹은 (그 광석을) 뚫고 깨는 일에 비유된다. 몸身의 세계世界 가운데 인아人我의 산山이 있고, 인아의 산 가운데 번뇌의 광석이 있다. 번뇌의 광석 가운데 불성의 보물이 있고, '불성의 보물 가운데 지혜의 제련공 智慧工匠이 있다!'
지혜의 제련공을 써서, 인아의 산을 깨고 뚫어, 거기서 번뇌 광석을 보고, 이를 깨달음의 불로 제련하여, 거기 금강불성金剛佛性이 분명히 明淨하게 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이 경經의 이름을 금강에 빗대어 짓게 되었다.
p.61
사바세계의 삶은 비유하자면 파도가 일고 흙탕물이 뒤섞이는 혼란과 고통이라 하겠는데, 이 고苦의 현실을 만든 것은 무시이래 계속 불고 있는 '무지의 바람', 즉 무명풍無明風입니다!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불교는 고통과 번뇌의 근본 원인이 외부의 조건이나 환경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가난과 역경, 전쟁과 기아 같은 외적 환경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과 비참의 근본 원인이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 있다고, 즉 주변의 여건이나 타인의 악의가 아니라, 내 마음의 독소 때문에 야기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특이한 발상이 상식에 젖은 세속의 우리들을 곤혹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모든 문제를 '바깥'에 돌리고, 남의 탓을 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p.105~106
비구들이여, 사람도 저와 같이 불타고 있다. 사람의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1) 눈이 타고 있고, 눈이 보는 물질이 타고 있다. 귀가 타고 있고, 귀가 듣는 소리가 타고 있다. 코가 타고 있고, 코가 맡는 냄새가 타고 있다. 혀가 타고 있고, 혀가 느끼는 맛이 타고 있다. 몸이 타고 있고, 몸이 접촉하는 감촉이 타고 있다. 의식이 타고 있고, 의식이 소비하는 대상인 생각이 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타고 있는가.
2) 다름 아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에 불타는 것이다.
3) 그로 인해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불타고 있고, 또한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이 불타고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 모든 불타는 것과 그 원인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일체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질 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꽃이 꺼지고, 그때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된다.
(브루스터, <고타마 붓다의 생애>, 97~98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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