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76~177
"마음의 상태를 대지地처럼 개발해라, 라훌라야. 사람들이 그 위에서 깨끗하고 더러운 것들, 똥이나 오줌, 침이나 고름과 피를 마구 뿌리지만, 대지는 저항하거나 혐오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네가 대지처럼 자란다면 어떤 유쾌하고 불쾌한 일도 너의 마음을 붙잡거나 들러붙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네 마음을 물水처럼 개발해라, 라훌라야. 사람들은 거기로 깨끗하고 더러운 을 마구 던져 넣지만, 물은 거기 저항하거나 혐오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또한 불火는 모든 더럽고 깨끗한 것을 태우며, 공기風은 모든 것을 날려보내며, 또 공간 속에는 거기 아무것도 세워둔 것이 없다."
"친밀한 마음慈를 개발해라, 라훌라야. 그렇게 하면, 악의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동점심悲를 개발해라, 그리하면 본뇌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喜를 개발해라, 그리하면 혐오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평정捨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모순들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몸이 부패하고 있는 것을 더욱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정념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떠서 흘러가는 성질을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자아의 오만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호흡을 고르게 가다듬는 '마음의 상태'를 개발해라. 사문은 숲으로 가서, 나무 둥치 아래, 혹은 빈집에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몸을 곧게 펴고, 정신을 통일시킨다. 그는 호흡이 들고 나는 것을 완전히 자각한다. 그가 호흡을 길게 들이쉬고 내쉴 때, 그는 그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호흡을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 그는 그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그는 몸의 전 과정과 마음의 전 작용을 의식하도록 자신을 훈련한다. 아울러 모든 사물의 무상함을 깨닫도록, 그리고 무정념과 무집착 속에서 쉴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한다. 정돈된 호흡의 상태를 개발하는 것은 이 점에서 매우 유용하고 생산적이다. 그렇게 호흡을 다스려나간 사람은 그의 마지막 숨을 내쉴때도 무의식의 혼침 속에 가라앉지 않고 완전한 의식의 각성을 유지한다."
p.193
우리 모두가 수많은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선한 얼굴과 악한 얼굴, 아귀와 야차의 얼굴에서 자비와 헌신의 보살의 얼굴까지,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그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얼굴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무 각박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를 돌아본 다음, 다른 사람에게는 관용과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는 것이 불도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p.196~197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내게 '이것이오' 하며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 수많은 얼굴들 가운데 어느 것이 당신의 진짜 얼굴입니까. "너는 누구냐"가 불교와 선의 오래된 물음임은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달마와 혜능뿐만 아니라, 서방의 셰익스피어도 이렇게 곤혹스럽게 물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p.208
"(모든 것이) 남他에 의지依하고 있어, 스스로自 독립立해 있는 것은 없다非네. (어떤 사물이나 사태도) 반드시必, 여러衆 인연緣을 빌려假 이루어成진다네. 해日가 기울면謝 나무樹에 그림자影가 없어無지고, 등불燈이 오면來 방室이 곧乃 밝하진다明. 사물名은 여러 계기의 협력共業으로 인因해 변화變하고, 모든 현상萬象은 작은 계기微들이 쌓여積 생긴다生네, 만약若 사물의 진정한眞 모습空色을 깨닫는다면悟, 바로 그 순간翛然, 그대는 '이름의 고착과 환상有名'을 떠나게去 될 것이다."
p.221
우리는 사람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비즈니스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가깝다는 가족이나 친구도 까마득히 멀어 보이기 쉽습니다. 시인 고은은 이렇게 읊은 적이 있습니다. "안아도 안아도 아득한 아내의 허리......" 우리는 바로 앞에 선 사람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자기 욕망의 투영인 '이미지相'을 통해 그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나를 찬양했거나, 모욕했고,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스타일에,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인상에, 습관에, 또 내가 존경하는 지식 혹은 내가 경멸하는 지적 수준에, 내가 샘내는 부귀 혹은 내가 천시하는 가난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득을 준 사람, 혹은 줄 사람 또는 내게 해를 끼친 사람, 혹은 끼칠 사람......
그런 '이미지'를 통해서만 상대와 나는 관계를 맺습니다. 아내, 남편, 아이, 이웃, 나라, 지도자나 정치가들, 대상은 달라도, 흡사 카메라가 서로 다른 피사체를 찍듯이,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패턴은 가깝거나 멀거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나날의 삶의 모습이고, 우리가 늘 불행한 이유입니다.
p.222~223
세상이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내 욕망과 기대를 통해 아내와 남편, 가족과 친구들을 평가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미지相를 버리고 실제法와 만나십시오. 아내의 젖은 손을 잡아주고, 남편의 지친 어깨에 묻은 비듬을 털어주십시오. "네가 왜 이런 일을 해주지 않지?"라는 불평과 기대를 접고, "내가 무슨 위로를 주고, 무슨 힘을 보태 함께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까"를 생각하십시오. 생각 하나가 우주의 균형을 바꾸고, 불가사의한 기적을 하루아침에 만들어줍니다.
p.251~252
우리가 지워야 할 이름은 열등하고 사악한 것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있는 이름들일수록, 자신을 옥죄고 사람들과 편안하게 교제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재산 지위 명예 등의 외면적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종교적 진리까지, 그것이 '이름'일 때는 결연히, 버려야만, 임제의 칼날처럼 "아버지를 베고 붓다와 조사를 베어야만", 여러분은 자신의 불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금강경]은 말합니다. "수부티야, 내가 말하는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불법이라 한다."
저번에 말씀드린 화엄華嚴의 그것들처럼, 여런분은 들판과 우주에 마음대로 피어 있는 화려한, 이름없는 무위無位의 들꽃들입니다. 여러분 각자들로 하여 우주는 빛과 생명을 얻으니 [금강경]은 이를 장엄불토莊嚴佛土, 즉 "붓다와 나라를 치장하는" 보석들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보석입니다. 그래서 금강金剛 불성이라 하지 않습디까.
p.254
불교가 말하는 유무有無는, 이른바 객관적 사태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이렇게 자아의 관심에 의해 '의미화된 것으로서의 존재'와 관련된 말임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유무有無를 말할 때, 그것은 법法이 아니라 상相에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p.305
불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물리적 세계를 받아들일 것.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지금 여기의 이 사바밖에는 없으니, 너는 네게 주어진 삶을 떠나려는 유혹과 부단히 싸워야 한다. 2)그 속에서 다만 우리의 정신적 삶을 업그레이드하고 혁신시켜나가자.
그런데, 그런데, 화엄은 이런 인간적 노력들을 일거에 헌신짝처럼 밟고 지나갑니다. 이 가르침이 얼마나 파격적이냐 하면, "이승二乘 사과四果가 귀먹고 눈멀어지는 곳으로, 범부 하사下士들의 멋모른 웃음거리가 된다"고 적을 정도입니다. 화엄이 대체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하길래 그러느냐고요.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화엄은 지금까지의 불교와는 달리, "사바와 법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벗어나야 할 사바도 없고, 들어서야 할 법계도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화엄은 모든 인간적 문제의 원천 무효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선언 앞에서 우리는 흡사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립니다.
p.329~330
더 위대한 것은 원효의 다음 말입니다. 화엄의 원만 돈교圓滿 頓敎만이 아니라, 팔만의 크고 작은 가르침과 수행법들이 다들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날개 짧은 작은 새는 산림에 의지해서 크고 있고, 송사리처럼 작은 물고기는 여울에 살면서도 본성에 편안한 법이니, 천근한 방편의 가르침이라 하여 내버릴 수 없다!
p.357
초자연적 실재란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헛소리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實際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法界입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습니다. 오늘 지은 업業이 마음의 창고如來藏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種子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입니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영복 - 담론 (1) (0) | 2015.11.09 |
---|---|
러셀 서양철학사(1) (0) | 2015.11.08 |
붓다의 치명적 농담(2) (0) | 2015.10.31 |
붓다의 치명적 농담(1) (0) | 2015.10.29 |
나를 지켜낸다는 것(1) (0) | 2015.06.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