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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신영복 - 담론 (1)

by Diligejy 2015. 11. 9.

p.13~14

오랜 강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사와 학생이란 관계가 비대칭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 분들은 가르치는 것을 '깨우친다'고 했습니다.

모르던 것을 이야기만 듣고 알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그림을 보여드리면 여러분은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앨범에서 그와 비슷한 그림을 찾아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설득하거나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나는 20년의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의 상한上限이 공감입니다.

 

p.15

우리의 강의는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갈 것입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p.16

이탁오李卓吾는 사제師第가 아니라 사우師友 정도가 좋다고 합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자는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p.18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는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p.18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p.19

공부란 세계 인식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창조입니다. 고전 공부는 고전 지식을 습득하는 교양학이 아니라 인류의 지적 유산을 토대로 하여 미래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실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전 공부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三讀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탈문맥' 脫文脈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어느 시대이든 공부는 당대의 문맥을 뛰어넘는 탈문맥의 창조적 실천입니다.

 

p.20

우리는 생각이 머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전두엽의 변연계에서 형성되는 이미지를 생각이라고 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잊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어머니가 떠나간 자녀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가슴이 합니다. 생각은 가슴으로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며, 관점을 달리한다면 내가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입니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애정과 공감입니다.

 

p.21~22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리엔트에서 지중해의 그리스 로마 반도로, 다시 알프스 북부의 오지에서 바흐, 모차르트, 합스부르크 600년 문화가 꽃핍니다. 그리고 북쪽 바닷가의 네덜란드와 섬나라 영국으로 그 중심부가 이동합니다. 미국은 유럽의 식민지였습니다. 중국은 중심부가 변방으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역동성은 끊임없이 주입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서쪽 변방의 진秦나라가 통일했습니다. 글안契丹과 몽고와 만주 등 변방의 역동성이 끊임없이 중심부에 주입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의 의미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변방성邊方性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창조 공간이 되지 못합니다.

 

p.29~30

세계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강녀孟姜女 전설을 소개했습니다. 맹강녀는 만리장성 축조에 강제 동원되어 몇 년째 소식이 없는 남편을 찾아갑니다. 겨울옷 한 벌을 지어서 먼 길을 찾아왔지만 남편은 이미 죽어 시체마저 찾을 길 없습니다. 당시에는 시체를 성채 속에 함께 쌓아 버렸다고 합니다. 맹강녀는 성채 앞에 옷을 바치고 사흘 밤낮을 통곡했습니다. 드디어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尸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옷을 입혀서 곱게 장례 지낸 다음 맹강녀는 노룡두에 올라 바다에 투신합니다. 맹강녀 전설이 사실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인가 하는 물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설 쪽이 훨씬 더 진실합니다. 어쩌면 사실이란 작은 레고 조각에 불과하고 그 조각들을 모으면 비로소 진실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언어를 뛰어넘고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의 창조인 셈입니다. 우리의 세계 인식도

이러해야 합니다. 공부는 진실의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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