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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1)

by Diligejy 2015. 11. 20.

p.31~32

앞으로 당신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신은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33

미켈란젤로가 그린 신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사실 이 노인은 히브리인들의 성서에 나오는 '야훼(YHeh)'가 아닙니다. 그리스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Zeus)'지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피테르(Jupiter)라는 라틴어로 부르던, 이 그리스 신들의 왕을 거리낌 없이 야훼와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p.38~39

이 모든 일이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려던 그리스인들의 열망에서 비롯되었지요. 인류 역사를 두고 인간의 육체를 이처럼 신성화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미켈란젤로가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바로 그 정신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육체를 다듬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그리스 정신에 충실했는지는 그의 그림 <천지창조>가 그리스인들의 신화가 아닌, 히브리인들의 성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옷 벗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관습은 "내가 벌거벗었기에 두려워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라는 아담의 말에서도 드러나지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무슨 의복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데도 아담이 이렇게 말한 것은 히브리인들의 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입니다. 초기 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히브리인들의 기본 예법 중 하나가 옷을 벗지 말라는 것이지요.

 

p.41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냐고요?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육체를 신성화했다고는 해도, 단순히 육체의 자연적 아름다움에만 매혹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idea)의미', 곧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可視的)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可知的)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 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

 

p.51~52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우스나 아폴론 같은 유형(有形)의 그리스적 신 개념이 처음으로 '부동의 운동자'라는 무형(無形)의 자연 원리로 바뀐 겁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다분히 종교적으로 설정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urgos)를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무형의 신 개념을 그리스 철학 안에 최초로 확정한 계기였지요.

 

p.52~53

왜 구약성서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26)라는 구절이 있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분명 그 구절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사용된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형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첼렘은 원래 '그림자'(시편 39:6)라는 뜻이지요.

또한 '모양'을 의미하는 떼무트는 보통 '어떤 것과 닮은 상태'(역대기하 4:3, 이사야 40:18)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신의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적 본성'을 뜻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이지요.

 

p.54

외적 형태를 의미하던 히브리어 '첼렘'과 '떼무트'를 기독교 신학자들은 어떤 내적 본성을-지성과 이성이건, 선성이건 또는 순결성이건-뜻하는 신학적 용어로 해석했습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어 이데아(idea)나 에이도스(eidos)가 본래는 어떤 사물이 '눈에 보이는 모양', 곧 '형상'이라는 단순한 뜻이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세상의 모든 사물 안에 깃들어 있어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게끔 하는 실체'라는 매우 특별한 철학적 뜻을 갖게 된 것과 매우 흡사하지요.

 

p.55~56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하는 것 같은 극적 종합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분히 종교적이면서도 분명 존재론적인 성격을 띠고, 여전히 히브리적이면서도 여실히 그리스적이지요.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갖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독일 출신 현대신학자 파울 틸리히(P. Tillich, 1886~1965)의 말에도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p.56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omnipresence)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매우 독특한 신론에서- 그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 안에 존재하며, 그에 의해 인도되는 피조물로서의-모든 인간은 당연히 그의 말과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교리가 자연스레 파생된 것이지요.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선하게 이루어져 그것을 복(福)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역하면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자기파멸을 인간은 벌(罰)이라는 형태로 경험하게 되지요.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이러한 주장의 부단한 반복입니다.

 

p.57~59

아무튼 '신이 곧 존재'라는 가르침에서 신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상실(存在喪失), 곧 사망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일 뿐이지요.

신은 영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킨 겁니다. 이처럼 성서는 낙원추방의 서사에서부터 존재론적 함축성을 이미 내포한 것이지요.

 

p.60

우리가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어요. 꼭 성서가 아니더라도 서양의 뛰어난 문학작품들에서는 이 같은-종교적이기도 하고 존재론적이기도 한-축복과 징벌에 관한 체험을 끊임없이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비록 그것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고 놓치기 십상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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