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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니체 극장

by Diligejy 2022. 1. 29.

https://coupa.ng/cbPE44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COUPANG

www.coupang.com

 

p.10~11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결정 불가능성'의 상황은 해석자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내 우산을 잊어버렸다"와 같은 단순한 문장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문장을 읽는 사람의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데리다는 니체의 텍스트 전체가 그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만 따져보면 대체로 명료하지만, 그 문장들이 모여 이룬 사유의 숲은 어두워서 한번 들어서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데리다보다 먼저, 니체의 텍스트 안에서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그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카를 야스퍼스다. 야스퍼스가 보기에 니체 사상을 탐구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전체를 통일하여 수미일관한 체계로 제시할 수 없다. 그래서 니체 연구는 한 발씩 전진할 때마다 끝없이 밀어닥치는 불안"에 맞닥뜨리는 일이 된다. 불안과의 조우는 끝이 나지 않는다. 야스퍼스는 그 불안의 원인이 니체 텍스트의 근본적인 자기모순에 있다고 말한다. "자기모순은 니체 사상의 특징이다. 우리는 니체의 어떤 판단이든 거의 언제나 정반대의 판단을 발견할 수 있다." 니체 안에는 무신론자와 신앙인, 보수주의자와 급진주의자, 정치적인 자와 비정치적인 자, 자유사상가와 광신자가 함께 있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니체로부터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만, 그의 삶과 글 전체를 통일적 체계로 이해하려 하자마자 즉시 모순에 빠진다. 그 모순이 우리 안에 해소할 길 없는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p.20

체험Erlebnis은 경험Erfahrung과 다른 것이어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의 삶과 내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표면만 만지작거리다 끝난다. 다시말해 타인의 삶이 풍경으로 다가와 감각의 즐거움으로 소비되고 말 뿐이다. 그러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존재의 내적 변모를 겪는다. 한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삶을 살아봄으로써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된다. 한 인간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일부가 되며 우리를 우리 이상의 존재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 인간이 비범한 사유의 깊이에 도달한, 예외적인 삶을 산 인간이라면 우리의 체험은 그만큼 풍부한 것이 된다.

 

p.21

강한 정신은 열정을 근절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최대한 글어올려 극단에 이르게 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무서운 의지로 절도를 부여하는 것이다. 니체는 극단과 절도의 일치를 '활'의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양극단을 최대한 잡아당겨 팽팽하게 만들어놓은 활이야말로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열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뒤 그 극단을 절도로써 잡아당김으로써 우리는 팽팽한 시위의 힘으로 삶의 화살을 쏠 수 있다. 니체는 그 점을 간명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팽팽한 활을 가지고 가장 먼 표적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선악의 저편>, '서문') 자기 내부의 디오니소스적 힘과 충동과 야수성을 모두 그대로 최대치로 밀어붙이되 바로 그 상태에서 절도를 요청하는 것, 자기 내부의 아폴론을 불러내 그 폭발하는 힘에 규율을 부여하는 것, 그 힘을 자기 창조와 세계 창조로 분출시키는 것,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을 내장한 디오니소스로서 강자의 모습이다.

 

p.36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하지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질문하라."

 

1865년 6월 11일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

 

p.44~45

1858년 가을 니체는 당시 최고 명문으로 꼽히던 고전어 학교 슐포르타에 들어갔다. 슐포르타로 떠나기 전 나움부르크 집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며 니체는 첫 자전 기록 <나의 삶>을 쓴다. 14년 동안의 삶을 기록한 이 짧은 자서전은 당시 니체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준다.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경험했다. 기쁨과 슬픔, 즐거운 일과 슬픈 일들을. 하지만 이 모든 것 속에서 신은 아버지가 자신의 약하고 어린 아들을 인도하듯이 안전하게 나를 이끌어주셨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그 분의 종이 되겠다고 확고하게 결심했다. 주님께서 나의 이런 뜻을 실행할 수 있는 강인함과 힘을 주시고 인생의 길 위에서 나를 보호해 주시기를!" 그러나 이 경건한 약속을 니체는 청소년기가 끝나기 전에 깨뜨리게 될 것이다.

 

이 기록에서 니체는 이런 고백도 했다. "어쨌든 작은 책을 쓰고 그것을 스스로 읽어보는 것이 언제나 나의 소망이었다." 소년 니체는 자신의 삶이 한 권의 책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기쁨에 떤다. 그는 이 기록을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맺었다. "이런 책을 여러 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짧은 문장들은 아주 많은 것을 암시한다. 그가 일찍이 책을 쓰고 싶어했고 그 일에 열정적이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그가 쓴 첫 책이 '자서전'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제1관심사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그 책을 스스로 읽어보고 싶어 했다는 것은 자기 관계 안에서 만족을 느끼는 강한 나르시시즘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기록으로 시작한 니체의 자서전 쓰기는 학창시절 동안(1858~1868)에만 아홉 편에 이르렀다. 철학적 저서에서 니체만큼 자주 '나'를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니체에게 '나'는 철학의 주제였고 과제였고 목표였다. 

 

p.50~51

<운명과 역사>는 니체 사유의 또 다른 본질적 특징을 엿보게 한다. '관습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각'으로 사태를 판단하는 일이 '죽음과 파멸'의 위험을 동반하는 거대한 모험, 일생이 걸릴지도 모를 모험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만큼 절박하고 위태로운 인식이다. 니체는 이 글에서 기독교를 단지 부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니체에게 더 큰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었다. 만일 신이 없다면, 만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만일 성령과 계시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종교적 환상을 빼고 나면 어떤 실제적인 것이 남을 것인가? 신을 통해서 모든 것이 의미와 목적을 얻게 되는데, 만일 신이 사라진다면 자연과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의미와 목적이 사라지고 만다. 신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야말로 니체의 가장 절실한,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p.68~69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앞시대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쇼펜하우어는 자신이야말로 칸트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칸트의 본체계와 현상계, 즉 '사물 자체'와 '현상'은 쇼펜하우어에게 와서 '의지의 세계'와 '표상의 세계'가 됐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현상 세계가 '표상의 세계'이며, 인식할 수도 지각할 수도 없는 '사물 자체'의 세계가 바로 '의지의 세계'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의 세계가 본질적인 세계이며, 표상의 세계는 표면적인 세계이다. 이 표상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지성 활동이다. 지성은 이차적이며, 본체계에 속하는 의지가 일차적이다. 지성과 의지는 절대적으로 대립한다.

 

쇼펜하우어가 바라본 세계는 이렇게 이원적인 세계다. 외적으로는 사건, 대상, 시간, 공간, 원인과 결과, 현상, 곧 '표상'의 세계가 있고, 내적으로는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가 없는 침묵의 세계, 본체의 세계, 하나이면서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의지'의 세계가 있다. 의지는 생명의 일차적인 힘이고 우주를 운행시키며, 문자 그대로 '세계를 돌아가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중력과 같은 물리적 힘, 동물의 본능들, 식물계의 맹목적 충동들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지성은 '의지'의 도구로 진화해왔으며, 따라서 의지에 비해 이차적이다. 그러나 개체들은 지성을 발전시켜 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의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지성을 쇼펜하우어는 '천재'라고 부른다.

 

개별적 의지는 악이며 부정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판단에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이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단일한 본체적 세계인 의지는 '개별화 원리'에 따라 조각조각 나뉘어 다수의 '의지들'이 된다. 이 개별 의지로서 개체들은 가능한 한 오래 존속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의지란 바꿔 말하면, 삶에 대한 욕망, 곧 살고자 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개체는 모든 사물들과 모든 사람들을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결국에는 마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사물들과 사물들을 이용한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느끼기 때문에 결과는 보편적인 갈등이다. 갈등은 불행을 양산하며, 의지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고통이 있다. 의지의 본성은 노력하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은 언제나 투쟁을 양산하고, 불행은 언제나 행복을 능가할 것이다. ......

 

삶이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며, 이런 사태를 깨닫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정'이다. 곧 그는 '의지를 부정하며',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직 삶에서 해방되기만을 기다리는 수행자나 성자가 된다. 죽음만이 유일하게 실제적인 선이다. 따라서 죽음 이전에 가능한 좋은 삶이란 천재의 한 유형인 성자의 삶이다. 그에게는 '오직 인식만이 남고 의지는 사라진다.'" 이것이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이며, 이 지점에서 그의 철학은 다른 철학들과 구별된다.

 

p.198

너는 너의 주인이며 동시에 네 자신의 미덕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과거에는 미덕이 너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 미덕은 다른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너의 도구여야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서문', 6절

 

p.270

'시기심'이라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는 다음의 아포리즘은 촌철살인처럼 명확한 데다, 20세기 독일 역사와 겹쳐 읽으면 의미심장함이 더해진다.

세계의 파괴자.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잘 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격분해 소리친다. "모두 멸망해버려라!" 이 혐오스러운 감정은 최대의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인바, 이렇게 추론한다.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없다. 따라서 전 세계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된다! 전 세계는 무 無여야 한다!"

<아침놀>, 304절

 

p.274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 276절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현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대양으로 너의 배를 띄워라! 너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자들과의 대립 속에서, 그리고 특히 너 자신과의 대립 속에서 살아라!"

<즐거운 학문>, 283절

 

p.284

"그러나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면, 나의 행동에 대해 내가 마음먹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정말로 그 일을 몇 번이고 수없이 계속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물음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니체 전집 12 유고(1881년 봄 ~ 1882년 여름)>

 

아득하고 낯선 천상의 행복과 은총과 은혜를 꿈꾸며 학수고대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어하며,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살 것! 우리의 사명은 매순간 우리 가까이 다가온다.

<니체 전집 12 유고(1881년 봄 ~ 1882년 여름)>

 

이 두 인용문은 앞의 인용문과 다른 종류의 진술을 담고 있다. "'내가 정말로 그 일을 몇 번이고 수없이 계속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물음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라고 단언하고,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어하며,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살 것!"이라고 요구하는 이 문장은 "모든 것이 똑같이 영원회귀한다"라는 우주론적 진술이 아니라, "그렇게 영원히 똑같이 되풀이되더라도 절대로,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의욕과 의지의 명령문이다. 이걸 '실존적 영원회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말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윤리적 명령이다.

 

p.288

어느 날 혹은 어느 밤, 한 악마가 가장 깊은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당신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너는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을 다시 한 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네 생애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다시 되풀이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동일한 순서로 말이다. 이 거미도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지금의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그것과 함께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또한 같이 회전할 것이다." 당신은 땅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서 그렇게 말한 그 악마를 저주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그 악마에게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그런 엄청난 순간을 체험한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사상이 당신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은 현재의 당신을 변화시킬 것인고 아마 분쇄해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 하나하나에 대해서 가해지는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그 이상의 어느 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서 너는 너 자신과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가야만 하는가?

<즐거운 학문>, 341절

 

p.293~294

니체가 신의 죽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것은 니힐리즘(허무주의)의 도래다. 신이 사라지면 신을 근거로 삼아 성립됐던 가치들이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삶의 의미를 지탱하는 토대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다. 신의 죽음이라는 사태는 이렇게 인간의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살아갈 힘을 부여했던 것의 사멸을 의미한다. 신의 죽음은 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적 세계의 붕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신은 야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론과 목적론에 근거하고 있는 모든 형이상학적 세계 또는 가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세상, 곧 감각적인 세계와 신의 세상, 곧 초감각적인 세계가 나뉘어 있고 신의 세상이 인간의 세상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 이원론이라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의 나라의 도래에 있으며 역사의 끝에는 신의 인간 구원이 있다는 것이 목적론이다.

 

이와 관련해 마르틴 하이데거는 "신은 이념이나 이상들의 영역을 지칭하기 위한 이름"이라고 말하면서 이 신이 죽었다는 것은 "초감성적인 세계가 영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초감성적 세계는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형이상학은, 다시 말해 니체가 플라톤주의라고 이해하였던 서양 철학은 그 종말에 이른 것이다."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고 방향을 잡아주던 신의 세계, 초감각적 세계, 본질적 세계, 목적의 왕국이 신의 죽음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인간 자신이 스스로 목적을 찾고 왕국을 세우는 일뿐이다.

 

 

p.298

운명애란 니체에게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명령문이다. 그렇다면 운명을 사랑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니체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것, 그리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피해갈 수 없이 닥쳐오는 것, 겪어야 하는 것이라면 부정하고 거부하지 말고 흔쾌하게 받아들여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비난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무엇을 비난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여기서 니체가 '오류'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들어보자. 니체는 이 책의 다른 아포리즘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 진리로서 ...... 그대가 사랑했던 것이 이제 오류로 나타나면 그대는 그것을 배척하고는 그대의 이성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대가 다른 사람이었을 그 당시에 저 오류는 아마도 그대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진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대에게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당시까지 보아서는 안 되었던 많은 것들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피부와 같은 것이었다. 그대의 이성이 아니라, 그대의 새로운 삶이 과거의 견해를 죽여버린 것이다.

<즐거운 학문>, 307절 

p.356

"일체의 글 가운데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p.361

'Ubermensch'(위버멘슈)는 니체 철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역자들마다 여러 이름으로 번역한다. 먼저 니체전집편집위원회는 위버멘슈를 따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역했다. "위버멘슈는 초월적 신격을 대신하여 이 땅의 주인이 될 인간인데, 그런 그를 초인으로 옮겼을 때 초월적 인격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김정현은 위버멘슈를 '극복인'으로 번역한다. "이 용어 번역의 타당성은 니체의 인간학 전체에 대한 포괄적이고 상세한 논의를 통해 앞으로 밝혀져야 할 과제인데,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 용어를 '극복인'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진우는 '위버멘슈'나 '극복인'이란 번역을 비판하고 '초인'을 주장한다. "위버멘슈인가 초인인가. 초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니체의 철학적 의도를 잘 반영한다. 김정현은 위버멘슈를 극복인으로 번역하여 이미 특정한 해석의 방향을 암시한다. 게오르크 지멜은 '위버멘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초인(Ubermensch)이란 인간 종족의 훨씬 더 높은 단계를 기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시기는 발전 능력이 있는 한 그 단계를 넘어서는 초인이 존재한다." 지멜이 지적하는 대로 니체가 애초에 상정한 'Ubermensch'는 신이 사라진 시대에 신을 대체하는 인간, 인간을 초월한 인간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품고 있다. 그런 의미의 'Ubermensch'가 실현 가능성 혹은 존재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두 번째 문제다. 니체는 인간을 뛰어넘은 어떤 인간 이상의 존재를 가리켜 'Ubermensch'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Ubermensch'를 초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의미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고, 이 책에서는 'Ubermensch'를 초인으로 옮긴다.

 

p.371

니체는 신의 죽음을 비유로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기독교의 신이 죽었다면 그것은 우선은 연민 때문이라기보다는 근대 계몽 이성이 신의 자리를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자연법칙과 합리적 사유를 갖다 놓았기 때문이다. 옛 시대처럼 편안하게 아버지의 품에 안기듯이 신에게 안길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합리적 이성의 승리보다 신의 속성 변화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사 신이 눈물 많은 연약한 신이 되었다는 데 절망하는 것이다. <구약 성서>의 그 거칠고 야성적인 신은 <신약 성서>에서 가엾은 것들을 하염없이 동정하는 신이 되고 말았고, 바로 그 결과로 신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p.415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가 니체의 목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삶의 자기 극복과 초인의 탄생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민주주의 평등주의 이념과 가치들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반민주주의도 반평등주의도 니체에게는 수단의 지위에 머무른다. 반민주주의, 반평등주의를 목숨 걸고 지켜야만 니체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니체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니체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해독하고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니체가 그렇게 굳게 믿었던 반민주주의, 반평등주의 신념이 시대의 한계에 갇힌 오류로 드러난다고 해도 니체의 전체 기획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도 '삶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니체의 명제는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생각은 '권력의지' 사상으로 펼쳐진다.

 

p.425

기쁨을 주거나 고통을 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의 권력을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선 고통을 가한다. 왜냐하면 기쁨보다 고통이 권력을 느끼게 하는 데 훨씬 강한 느낌을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항상 그 원인에 대해 묻게 되는 반면에 기쁨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지닌다. 어떤 방식으로건 이미 우리에게 예속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호의를 베풂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권력을 증대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권력을 증대시키거나, 우리의 권력에 내재된 이점을 그들에게 보여주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더 만족하게 되어 우리의 권력에 대항하는 적대자들에게 한층 더 적의를 품게 되고 투지를 불태우기 때문이다.

<즐거운 학문>, 제1부, 13절

 

 

p.428

왜 복종보다 명령이 어려운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명령하는 자가 복종하는 자들 모두의 짐을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짐이 그를 쉽게 짓누를 수 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명령에는 시도와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명령을 할 때 생명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거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때조차 그렇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 '자기 극복에 대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예로 들어보자.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을 일으켜 세워 러시아 침략을 명령했을 때, 나폴레옹은 그 명령과 동시에 명령에 복종하는 국민들의 짐을 모두 짊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다. 나폴레옹은 처음엔 그 짐에 짓눌리지 않았겠지만, 러시아 정복에 실패하고 패퇴할 때는 아마도 그 짐의 무게를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 패배의 여파로 그는 결국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유배당하고 만다. 명령에는 그 명령이 가져올 결과들에 대한 책임도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명령은 언제나 시도와 모험을 품고 있는 것이다. 명령이 지닌 그런 위험의 성격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령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거는 행위여서 얻거나 잃거나 하는 '주사위 놀이'와 같은 것이다. 결과는 좋을 수도 있지만 나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 나는 내 존재 전체를 잃을 수도 있다. 바로 이 명령-복종의 관계 속에서 권력의지가 작동한다는 것을 니체의 날카로운 눈은 간파한 것이다.

 

p.429

권력의지를 표면만 보면 더 높은 삶, 더 많은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권력의지를 삶을 위한 것, 삶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권력의지는 오직 권력의지 자체를 목표로 할 뿐, 삶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사람은 어떤 경우엔 적극적으로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삶을 내버려서라도 붙들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다. 그러므로 권력의지는 삶의 의지로 환원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권력의지가 삶의 의지, 번식의 의지, 번영의 의지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권력의지의 범주는 삶의 의지보다 크다. 극단적인 경우에 삶을 던져서라도 자기를 관철하는 것이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죽음으로 이끄는 극단적 금욕주의조차 권력의지의 한 발현 방식이다.

 

이런 사실을 니체는 뒷날 <도덕의 계보>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리고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지하고자 한다." <도덕의 계보>, 제3논문, 28절 무언가를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느니, 무라도 의지한다는 것이 니체의 발견이다. 즉 허무의 의지로 세계를 파괴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니체는 복종 행위, 자살 행위, 헌신 행위에서 모두 권력의지라는 공통요소를 찾아낸다.

 

p.447

이기심이라는 악에 대해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사이비 현자들, 모든 사제들과 세상살이에 지쳐 있는자, 여인과 하인의 영혼을 지닌 자, 오, 예로부터 이런 자들의 농간이 얼마나 이기심을 학대해왔던가! 거기에다 이기심을 학대한 것, 바로 그런 행위가 덕으로 간주되고 덕으로 불려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무욕', 세상살이에 지쳐 있는 겁쟁이들, 그리고 십자거미들이 그것(무욕)을 소망한 것도 실로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그날이, 변화와 심판의 날이, '저 위대한 정오'가 다가오고 있다. 이제 많은 것이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나리라! 그리고 자아를 두고 건전하고 신성하다고 말하며, 이기심을 두고 복되다고 말하는 자, 그는 진정 예언자로서 그가 통찰하고 있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흔히 말하는 세 가지 악에 대하여', 2절

 

p.487

그대들은 언젠가 쾌락을 향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오, 나의 벗들이여. 그랬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온갖 고통에 대해서도 '좋다'고 말한 것이 된다. 모든 사물은 사슬로 연결돼 있고 실로 묶여 있으니 그대들이 일찍이 어떤 한 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일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영원한,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고, 실로 묶여 있고 사랑으로 이어져 있는.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 된다. 그대 영원한 존재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고통을 향해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되돌아오라!"고 말하라. 모든 쾌락은 영원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몽중 보행자의 노래', 10절

 

p.505

니체의 삶은 끝없는 질병의 침탈과 회복의 반복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니체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삶을 의욕했고, 의욕하는 그 순간엔 죽음과도 같은 고통조차도 긍정할 수 있었다. 그는 부활했고 창조의 의지로 불탔다. 니체에게 삶은 끝도 없는 고통의 연속이지만, 삶은 또 그 고통을 넘어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도 시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한"살마이고 "가장 가혹한 고통조차도 긍정하는" 사람이다. 니체는 고통에 짓눌리는 자기 존재가 "갈기갈기 찢긴 디오니소스"와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삶은 결코 고통에 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태어나고 파괴로부터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영원회귀일 것이다. 언제나 파괴당하면서 다시 부활하고 되돌아오는 삶에서 니체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보았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도 날려버리는 것도 아니다.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까지 껴안는 것이다. 거기에 버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하여 니체의 영원회귀는 병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실존의 밑바닥으로부터의 귀환이며 삶의 부활이다.

 

p.506-507

권력의지는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를 출렁이게 하는 힘들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삶을 이끌어가는 무한한 재생의 동력이다.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소멸되지 않고, 꺾인 뒤에도 다시 일어서는 더 많은 힘을 향한 의지, 그것이 권력의지다. 그리하여 권력의지는 삶의 본질이고 영원회귀는 삶의 형식이다. 질병과 고통의 영원한 반복은 권력의지를 시험하는 시련이다. 영원회귀 앞에서 짓눌리지 않고, "좋다, 한 번 더!"라고 외치는 것. 어떤 고통도 어떤 시련도 회피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수락하는 것. 그리하여 매번 영원회귀 자체와 결전을 벌이는 것. 그것이 권력의지다.

 

p.519

니체가 바라본 괴테에 대해 박찬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괴테는 자신의 삶을 운명적인 것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기쁘게 긍정한다. 괴테는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순간들, 심지어 고통스런 순간들마저도 무의미한 우연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고양을 위해서 필연적인 것으로 긍정한다" 니체의 운명애는 피할 수 없는 숙명에 단순히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이 내던져진 우연한 상황들을 자신의 고양을 위해서 필연적인 상황으로 승화시키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운명애란 수동적인 체념의 표현이 아니라 최고의 능동성의 표현이며, 우연을 자신을 위한 내적인 필연성으로 형성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박찬국은 이 운명애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의 토대를 이룬다고 말한다. "진정하게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자, 맹목적으로 순환하는 것 같은 삶의 과정을 자기 고양의 필연적인 게기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만이 영원회귀를 원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영원회귀와 운명애는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운명애는 영원히 회귀하는 삶에 대한 주체적 대응방식이며, 영원회귀는 운명애가 감당해야 할 삶의 도전이다.

 

p.539

니체가 세계를 귀족과 노예,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근거 구실을 하는 것이 권력의지, 다시 말해 '힘의 확장과 힘의 발현을 향한 의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처음 소개한 권력의지 사상을 더욱 깊이 탐사해 그 사상의 내용을 한층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 <선악의 저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계의 진정한 대립은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귀족과 노예의 대립이다. 귀족적인 것이야말로 권력의지가 제대로 발현된 모습이다. 권력의지를 구현하려면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노예적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선한 것은 긍정하고 악한 것은 부정한다는 사고, 우리는 선하고 너희는 악하다는 사고야 말로 노예의 사고다. 귀족의 권력의지는 선악을 따지지 않는다. 그들은 선악의 저편에 있다.

 

p.570~571

니체는 강자의 본질적 특성으로 '독립'을 든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기 자신에게만 기대는 존재가 강자다. 그는 위험을 스스로 떠맡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독립이란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며 강자의 특권이 속하는 것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아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강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인간일 것이다. 어쨌든 그는 미궁(라비린토스)으로 들어가는 셈이며 그로 인해 삶에 따라오기 마련인 위험을 1,000배나 불리는 셈이 된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하여 길을 잃어버리고 홀로 고립되어 양심이라는 괴물(미노타우로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는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결코 작은 위험이 아니다."

<선악의 저편>, 29절

아마도 이 구절은 니체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니체는 홀로 미궁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며, 미노타우로스에게 잡혀 갈기갈기 찢길 위기에 처한 사람이다. 니체는 강한 인간, 대담한 인간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강한 인간을 지향하는 사람은 자신이 강자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적절한 때에 시험해봐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는지,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는지 알기 위해 적절한 때를 골라 자기 자신을 시험해봐야 한다. 그 시험이 비록 가장 위험한 게임이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 말고는 증인이 되어주고 재판관이 되어줄 사람이 없는 그런 시험일지라도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매여서는 안 된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인간은 감옥이며 밀실이다. 조국에 매여서는 안 된다. ...... 연민에 매여서는 안 된다. ...... 학문에 매여서는 안 된다. ...... 자기 초월에 매여서는 안 된다. 눈 아래로 더 먼 곳을, 좀 더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더 높이 비상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새처럼 비상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미덕에 매여서는 안 된다. 훌륭하고 뛰어난 인간이 겪는 위험 중의 위험은 친절함이라는 부분적인 미덕 때문에 자신의 전체를 희생하는 일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독립성에 대한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선악의 저편>, 2장 41절

 

p.578

그대들은 가능한 한 ...... 고통을 근절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실로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키고, 이전보다 더 악화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 고통에 대한 훈련, 거대한 고통에 대한 훈련, 그대들은 바로 이 훈련이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향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불행 속에서 정신이 느끼는 긴장, 거대한 파국에 직면할 때의 정신의 전율, 불행을 짊어지고, 감내하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정신의 독창성과 용기, ....... 이 모든 것들이 고통을 통해, 거대한 고통의 훈련을 통해서 정신에 부여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 안에는 피조물과 창조자가 통일돼 있다. 인간 내부에 재료, 파편, 무절제, 점토, 오물, 광기, 혼돈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또한 창조자, 조각가, 무자비한 망치, 신과 같은 관조자, 그리고 제7일이 들어 있다. 그대들은 이러한 대립을 이해하는가? 그리고 그대들의 동정심이란 것이 '인간 안에 있는 피조물', 곧 형성되고 부서지고 단련되고 찢기고 불태워지고 달구어지고 정련되어야 하는 것, 고통 받을 수밖에 없고, 또 고통 받아야만 하는 것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가?

<선악의 저편>, 225절

고통이야말로 자기 창조의 원천적 힘이다. 니체는 고통의 크기가 한 인간의 고귀함과 비범함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큰 고통을 겪고 이겨낸 사람들에게 니체의 말은 어떻게 다가올까.

 

p.596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도덕의 계보>, 제3논문, 28절

 

p.600~601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하는 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도덕의 계보>, '서문', 1절

 

p.602~603

니체가 주목하는 것은 '선Gut'이라는 말이 어떻게 '선함(착함)'과 '좋음'이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 그리고 그 두 가지 뜻에 대응하여 '선함'에는 '악함'이, '좋음'에는 '나쁨'이 결부되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니체는 '선함'과 '좋음'이라는 두 가지 뜻의 기원이 명확하게 계급적으로 다르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좋음과 나쁨'은 귀족의 평가 방식이고, '선함과 악함'은 노예의 평가 방식이라는 게 니체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좋음과 나쁨'이 왜 귀죽의 평가 방식인지 니체의 설명을 다라가면서 이해해보자.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된 '좋음'이라는 명칭이 어원학적인 관점에서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었다. 여기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동일한 개념 변화에서 기인함을 발견했다. 즉 어느 언어에서나 '좋음'은 '고귀한', '귀족적인'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가 기본이며, 여기에서 '정신적으로 고귀한', '귀족적인',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질의',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가 필연적으로 발전해 나오는 것이다.

<도덕의 계보>, 제1논문, 4절

 

p.606~607

니체는 원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약자의 정신을 단 한 순간도 긍정하지 않는다. 약자는 원한의 정신을 지녔고, 강자는 약자와는 정반대의 정신을 지녔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안에서 맹금을 무서워하는 '어린양'과 그 양을 잡아먹는 '맹금'의 비유를 들어 강자와 약자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어린양들이 커다란 맹금을 몹시도 싫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이 커다란 맹금이 어린양을 채어가는 것을 비난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린양들이 저희들끼리 "맹금은 사악하다. 따라서 맹금과는 될수록 먼 것, 오히려 그 반대, 즉 어린양이야말로 '선한' 것이 아닌가?"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이 이상을 수립하는 데는 조금도 비난할 점이 없다. 더군다나 맹금들은 이것을 약간 비웃듯이 바라보며 "우리는 그들을, 이 선량한 양들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연한 어린양만큼 맛있는 것은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도덕의 계보>, 제1논문, 13절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니체가 긍정하는 귀족은 자기를 긍정하는 고귀한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귀족적 인간은 이 어린양을 잡아먹는 맹금과 같은 존재, 다시 말해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고, 상대의 뜻과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써먹는 자를 함께 뜻한다. 니체의 귀족은 자기 긍정으로 충만한 고귀한 인간의 모습과 정복욕으로 가득 찬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반면에 원한의 인간은 한편으로는 어린양처럼 순하고 선한 인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천하고 비굴한 인간이다. 원한의 인간은 집요한 복수 의지로 귀족을 넘어뜨리는 영리함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또 그런 점에서 강자에 맞서는 약자의 권력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결코 니체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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