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프랑스소설

불멸

by Diligejy 2022. 2. 17.

p.10

비록 얼굴과 육신은 이미 매력을 상실했다지만, 그 미소와 손짓에는 매력이 가득했다. 그것은 매력 잃은 육신 속에 가라앉아 있던 한 몸짓의 매력이었다. 그 부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이제 더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녀는 그 순간만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통해서 시간을 초월하여 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

 

p.23~24

아녜스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조물주가 컴퓨터에다 자세한 프로그램이 들어 있는 디스켓을 넣어 두고 떠나 버렸다는 생각.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후 버림받은 인간들 손에 맡겨버렸고, 그래서 지금 인간들이 신에게 길을 물으며 메아리 없는 공허 속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이 생각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선조들의 신에게서 버림받는 것과, 우주 컴퓨터의 신성한 발명자에게서 버림받는 것은 얘기가 완전 다르다. 신의 자리에는 신이 없는 동안 어김없이 하나하나 실행되는 프로그램만 남았으며, 그 내용을 우리는 전혀 변경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컴퓨터가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이 곧 미래가 상세하게 계획되어 있다거나, 모든 것이 '저 높은 곳'에 기록되어 있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1815년에 워털루 전투가 일어날 것이고, 프랑스군이 패하리라는 것 등이 프로그램에 명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은 천성 자체가 공격적이어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며, 기술의 진보가 전쟁을 갈수록 잔혹하게 만든다는 것만 명기되어 있다. 조물주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총괄 프로그램 내의 단순 변이 작용이거나 치환 작용일 뿐이다. 이 총괄 프로그램은 미래에 대한 예견과는 전혀 무관하며, 단지 여러 가능성의 경계들을 정해두고 있다. 그 경계들 사이에서 조물주는 모든 힘을 우연에 맡기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획이다. 어떤 아녜스, 어떤 폴도 컴퓨터에 기획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어떤 원형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개인적 본질도 없는, 그저 원 모델의 단순 파생물인 여러 견본들에서 뽑아 낸 인간 존재일 뿐인 것이다.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생산된 자동차 한 대보다 더 나을 게 없다. 그 자동차의 존재론적 본질은 자동차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 말하자면 설계사의 서류 보관함에서 찾아야 한다. 오직 일련번호만이 한 자동차와 다른 자동차를 구분한다. 인간이라는 견본품에 있어, 일련번호란 바로 독특하고 우연한 특징들의 조합인 얼굴이다. 성격도, 영혼도,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도 이 조합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은 단지 어떤 견본품의 일련번호일 뿐이다.

 

p.25~26

아녜스는 왜 그런 격정이 생겨나는지 자문해 보고,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우리가 지금 이 세상으로 보내진 이상, 우선 우리는 이 주사위 던지기, 신의 컴퓨터가 짜 둔 이 우연한 사건에 우리를 동화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이것(우리가 거울 속에서 대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자아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우리의 얼굴이 우리의 자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이 근본적인 첫 번째 환상을 용인하지 않고는 삶을 계속 영위할 수가, 적어도 진지하게 영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데 우리를 우리 자신에 동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열정적인 동화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눙에 인간 원형의 단순한 한 변이체로 비치지 않고,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고유의 본질을 지닌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젊은 여자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에 그 초상화가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심지어는 생명마저 내어줄 가치가 있는, 전적으로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한 뭔가를 담고 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p.42

그때 그녀의 맞은 편에서 오던 한 행인이 자신의 이마를 톡톡 치며 그녀에게 혐오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런 몸짓은 상대가 미쳤거나 머리가 약간 돌았음을 의미하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몸짓 언어다. 아녜스는 그 시선, 그 증오를 포착했을 때, 마음속에서 격렬한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작자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그를 사정없이 갈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보도 위에서 삼 초 이상 멈춰 서 있기란 불가능했기에 그 사내는 군중에 휩쓸려갔고, 아녜스 역시 군중에 떠밀려 갔다.

 

그녀는 계속 걸어가면서도 그 사내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 모두가 똑같은 소음에 포위 공격 당하고 있으므로 귀를 틀어막을 어떤 이유도, 어쩌면 그렇게 할 어떤 권리도 없음을 그녀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거였다. 그 사내는 그녀의 몸짓이 반칙임을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녀에게 그런 모욕을 가한 것, 그것은 모든 사람이 참아야 하는 것을 한 개인만 참지 않고자 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인격상의 평등이었다. 인격상의 평등이 그녀에게,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의 불화를 금지했던 것이다.

 

p.44

증오의 올가미는 우리를 너무나 긴밀하게 증오 대상에 옭아맨다. 전쟁의 외설스러움이 바로 그렇다. 함께 쏟는 피의 친밀함, 서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상대의 몸을 꿰뚫는 두 병정의 외설적인 친밀함, 아녜스는 확신한다. 아버지는 바로 그런 친밀함이 싫었다는 것을. 배 위에서의 그 소동에 정나미가 떨어져 차라리 익사하는 편을 택했다는 것을 말이다. 서로 치고, 서로 짓밟고, 필사적으로 서로 몸을 부딪는 그 사람들과의 신체 접촉이 그에게는 물의 순수 속에서 고독하게 죽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p.49~50

그렇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고독, 그것은 시선들의 감미로운 부재였다. 언젠가 동료 두 명이 병에 걸려 두 주 동안 그녀 혼자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날 저녁, 그녀는 놀랍게도 자신이 피로를 거의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야말로 몹쓸 압제자요, 흡혈귀의 입맞춤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을 새긴 것은 바로 시선들의 예리한 날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p.53~54

그녀는 영국 여왕의 여동생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하느님의 눈동자가 사진기로 대체된 거라고 중얼거렸다. 유일자의 눈이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로 대체되었다. 삶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난교 파티로 변해 버렸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열대지방의 한 해변에서 알몸으로 생일 파티를 벌이는 그 영국 황녀를 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사진기는 유명 인사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비행기가 당신 근처에 추락하고 불꽃이 당신의 셔츠에 옮겨 붙기만 해도 당신 역시 유명해져 이 전일적인 난교 파티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그 어디에도 몸을 숨길 수가 없으며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처분 아래 있음을 엄숙히 선언하는, 환락과는 전혀 무관한 난교파티에 말이다.

 

p.68~69

걸인들에 대한 그녀의 후한 인심 역시 그 기반은 부정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아녜스가 그들에게 동냥을 베푸는 것은 그들이 인류의 한 통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류의 이방인이요, 인류로부터 배제된, 아마도 그녀처럼 인류와 연대를 상실한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인류와의 비연대성.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오직 한 가지, 즉 어떤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만이 이 일탈로부터 그녀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타인들의 운명이 그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그 운명에 의존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까닭에 말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고통, 그들의 전쟁과 그들의 휴가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느낌을 더는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생각에 그녀는 두려웠다. 정말 그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폴도?

 

p.72~73

상대의 면전에서 "우리는 후생에서는 함께 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는 만나지 않길 원합니다."라고 외친다는 것은 "우리 둘 사이에서 어떤 사랑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그들이 큰 소리로 그렇게 외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의 모든 공동 생활(벌써 이십오 년이 넘은)이 사랑에 대한 환상에, 둘이서 함께 정성스레 꾸미고 가꾸는 환상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상상 속 장면에서 방문객의 질문에 맞닥뜨릴 때마다 자신이 늘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갈망, 자신의 소원에는 아랑곳없이, 결국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럼요 물론이죠. 나는 후생에서도 우리가 함께 있기를 원해요."

 

한데 오늘 처음으로, 그녀는 폴의 면전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마음속 깊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할 용기를 내리라고 확신한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깡그리 무너뜨리더라도 그렇게 말할 용기를 내리라고 확신한다. 바로 옆에서 심호흡 소리가 들려온다. 폴이 잠든 모양이다. 필름 틀이 다시 영사기 속으로 들어간 듯, 그녀는 다시 그 장면을 펼친다. 그녀는 방문객과 대화를 나누고, 폴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방문객이 묻는다. "두 분은 후생에서도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더는 만나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이상한 일이다. 방문객은 그들에 관한 온갖 정보를 다 갖고 있으면서도 지구인의 심리학만은 이해하지 못하며,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비록 선의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혹시 그들을 난처하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못 한다.)

 

아녜스는 온 힘을 모아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우린 더 이상 만나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그렇게 그녀는 사랑의 환상 앞에서 소리 나게 문을 닫아 버렸다.

 

p.125

우리는 불멸을 생각하지만, 죽음과 함께 생각해야 함을 망각하는 것이다.

 

p.135

결국, 불멸을 단장하고 미리 그 본을 뜨고 임의로 조작하고 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결코 불멸은 계획한 대로 실현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베토벤의 모자는 불멸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계획이 성공했다. 하지만 그 불멸의 모자가 가질 의미, 그것은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것이다.

 

p.138

분명히 말하지만 불멸은 내 알 바 아니었어요. 아니, 불멸이 나를 두 팔로 꽉 끌어안는 걸 확인한 그날, 내가 맛본 공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했죠. 사람은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불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일단 불멸의 배에 오르고 나면 영원히 내릴 수가 없지요. 나처럼 두개골을 권총으로 쏘아 버려도 자살한 모습 그대로 그 배 위에 머무릅니다. 끔찍한 일이에요. 요한. 정말 끔찍해요. 죽어서 갑판 위에 누워 있을 때, 나를 에워싼 여편네 네 명을 보았지요. 다들 쪼그리고 앉아, 나에 대해 아는 모든 걸 끼적거리고 있더군요. 그 뒤에서는 아들놈도 뭔가 써 대고, 늙은 마녀 거트루드 스타인도 거기서 뭘 쓰고, 나의 모든 친구들 역시 거기서 나에 대한 온갖 뒷공론과 중상을 떠들어 댔지요. 게다가 기자 수백 명이 마이크를 들이대며 앞을 다투어 그들을 뒤쫓았고, 미국의 모든 대학에서는 교수 군단이 그 모든 얘기들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발전시켜, 수없이 많은 논문과 수백 권의 책을 펴냈답니다.

 

p.164

매일 점점 더 많은 얼굴들이 등장하고 그 얼굴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아의 독창성을 확인하고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일성을 확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 법과 뺄셈 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냈다. (이 경우 연이은 뺄셈 때문에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다. (이 경우 덧붙은 속성들 때문에, 자아의 본질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다.)

 

'문학 > 프랑스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0) 2023.06.07
단순한 열정  (0) 2023.04.23
기억 2  (0) 2022.01.16
기억1  (0) 2022.01.06
고양이  (0) 2021.06.22

댓글